인생? 뭐 없겠지만 있을 수도 있으니까
유난히 더운 여름이었다. 한 번 치솟은 기온은 서울의 집값처럼 내려갈 줄을 몰랐다. 말끔히 차려입고 나서봤자 금세 땀범벅이 되었다. 곱게 화장하고 사우나로 직행하는 듯한 찜찜함을 외출할 때마다 느껴야 했다. 아,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 정말 아무것도.
최근 두 달간 운 좋게도 일이 꾸준히 들어왔다. 멍하니 백수 모드로 있다가 갑자기 일꾼 모드를 키려니 정신이 없었다. 마음에 없는 일은 무더위와 같아 사람을 금방 지치게 했다. 직장 생활 강도의 절반도 안 되는 업무인데도 의욕이 바닥이 나고야 말았다.
"쉽시다. 쉬어요. 쉬고 싶을 때 쉬려고 회사 나온 거 아닙니까."
우리는 의뢰가 온 일을 두 개나 거절하고 휴식을 선택했다. 프랑스는 여름 한 달을 쉰다는데 이런 더위라면 우리나라도 충분히 고려할만한 사항이 아닌가. 고작 이삼일의 휴가로 여름의 발랄함을 퉁치려는 나라라니. 참으로 무정하지 않은가.
인제는 겨울의 자작나무 숲으로 유명하지만 하얀 눈밭을 밟고 있는 건 자작나무 수만큼이나 무수히 시커먼 사람들이다. 사람이 없을 거 같다는 이유만으로도 한여름의 자작나무는 메리트가 있었다. 1박 2일, 짧은 일정으로 남자친구와 인제로 향했다. 그곳에서였다. 내가 나의 롤모델을 만난 건.
뚜벅이인 우리는 인제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펜션 주인에게 픽업을 요청했다. 서른한 살이지만 스물한 살 때의 방식과 차이가 없는 여행. 이 사실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 건 우리를 픽업하러 온 펜션 주인이 SUV 차량에서 내리면서부터였다. 포드를 몰고 나타난 할아버지와 할머니. 등이 굽은 할아버지는 갓 땅을 고르고 온 농부 같은 허름한 차림새였다. 곱게 화장을 한 할머니는 명품 가방을 들고 조수석에서 우리를 반겼다.
왜소한 몸집과는 다르게 할아버지가 운전하는 포드는 굽이치는 산 길을 거침없이 내달렸다. 그 모습에 이상하게 기가 죽었다. 차에 타고 있는 내내 무언가 마음이 불편했다. 등이 굽은 노인도 이 험한 산길을 유려히 헤쳐가는데 뭐가 그리 무섭다고 이 나이 먹도록 운전대 하나 제대로 잡지를 못할까. 언제쯤이면 뚜벅이 신세를 면할 수 있을까.
펜션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이고 얼마 후 눈앞엔 닭장이 펼쳐졌다. 그다음엔 고추 밭이 그다음에 블루베리 밭이 그다음이 되어서야 우리가 묵을 펜션이 나왔다. 우거진 숲에 둘러싸인 최신식의 건물이. 빼곡히 서 있는 나무들은 바람에 부딪혀 울고, 작은 연못에는 청개구리 한 마리가 울고. 마당의 스피커에선 이태원에서나 들릴법한 마리안 힐(Marian Hil)의 다운(Down)이 흐르고 있었다. 닭장과 고추밭을 헤쳐온 포드와 나무와 청개구리 사이를 흐르는 다운. 모든 게 너무 완벽했다.
숙소로 들어와 짐을 내려놓고 좌식 소파에 앉아 풍경을 감상하며 내가 입버릇처럼 말한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남자친구에겐 자주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는 시골에 가서 살고 싶어. 오두막 같은 집 하나 짓고 너른 마당에서 채소들 키우면서." 동료들에겐 이렇게도 말했다. "사무실이 꼭 사무실일 필요는 없잖아요 책방이 될 수도 있고 카페가 될 수도 있고." 동그랗고 작은 말들이 구슬 아이스크림처럼 머리에서 달그락거리다 녹아내렸다. 겉모습만 반질반질한 허황된 말들. 무더위 하나 이기지 못할 말들.
나는 여행하는 동안 갓 깎은 연필심처럼 까맣고 뾰족했다. 옆에 있던 남자친구는 자주 긁혔고 우리는 내내 싸웠다. 자작나무 숲 정상. 말없이 서로 떨어져 내려오는 동안 흐르는 눈물로 눈이 퉁퉁 붓는 게 느껴졌다. 못생긴 찐빵이 자작나무 숲을 내려가고 있었다. 도대체 포드를 타고 나타난 할아버지가 뭐길래 나를 이리도 어지럽힌단 말인가.
인제의 트럭이었다면, 도시에서의 포드였다면 나의 여름휴가는 온전했을 것이다. 시골길을 내달리는 미제 자동차. 허름한 복장의 건물주. 청개구리 옆에 최신 팝송.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완벽한 조화. 그 한편엔 돈이 있었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자본.
6년의 직장생활은 철저히 돈을 좇는 삶이었다. 결과적으로 월급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으니. 돈을 좇는 삶이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하는지 경험하고 나서 나는 의식적으로 자본을 외면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월세를 내고 살면서 말이다. 돈 말고 생활부터 챙기자는 마인드로 사업을 시작했고 정말 딱 그만큼의 주어진 돈으로 생활을 했다. 삶은 정확히 직장생활과는 반대 방향으로 치우쳤고 나는 또다시 그 기울어진 저울에서 바둥대다 지쳐버린 것이다. 직장생활 때와 마찬가지로. 못난 찐빵 얼굴을 하고선.
삶과 일을, 편리와 편안을, 자연과 자본을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단단히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인제 할아버지가, 저 노인이 되고 싶었다.
돈 버는 행위 자체를 멸시하는 것 또한 돈을 최우선을 두고 내달리는 경주마처럼 위태로운 삶이다. 외면해야 할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 수긍할 수 없는 방식들이었지 돈을 버는 행위 자체가 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백만 원만 벌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건 오만이었다. 행복하게 못 산다. 빠듯한 서울살이에 최처가 로드샵 옷 한 벌도 벌벌 떨면서 사야 한다. 외식으로 나간 돈을 계산하며 마트에서 장을 몇 번을 볼 수 있는 돈인지 손꼽아 보거나 부모님 생일날 변변한 용돈도 내밀지 못하는 자식이 된다. 그런 일은 행복하지 않았다. 시간과 마음의 여유만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 너무 많았다.
먹고 싶을 때 맛있는 걸 먹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고, 시골에 살아도 트럭이 아닌 SUV를 몰고 싶은 사람이 바로 나였다. 하나를 잃으면 그 하나가 또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게 욕심이었다.
다시 기울어진 저울의 초점을 맞춰야 할 시간이다. 저만치 무소유 코스프레 끝에 있던 바늘을 데려와 중심에 서게 해야 한다. 이번엔 어느 한쪽으로든 치우치지 않게.
인제에 다녀와서 나는 박조이와 스타워즈에게 문자를 남겼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큭큭 거리며 갑자기?라는 답장이 왔다.
"나 돈 벌고 싶어요. 시골에 살아도 포르셰를 몰 수 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고쳐먹은 마음과 달리 이후로 들어오던 일이 뚝 끊겼다. 그리하여 올여름은 내가 뱉은 말처럼 정말로 프랑스식 휴가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