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있다보면 병원 밖에서는 볼 수 없었던 훌륭한 병원의 UX디자인 사례들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의료진들이 임상현장에서 환자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실제 서비스에 적용한 사례들을 보면 왠만한 UX디자인 Best Practice보다 더 의미있는 결과물들을 목격하게 된다.
암환자의 패닉을 줄여주는 '암통합진료'
암 진단을 받은 환자는 암이 더 전이될까봐 매일 하루가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이다. 하지만 암을 치료하기위한 방법은 외과 수술, 방사선 치료, 화학요법, 면역요법 등 정말 다양하기 때문에 이중에서 어떤 치료를 받을지는 담당 의사들을 만나서 하나하나 확인해봐야 한다. 환자의 진행상태가 현재 외과 수술이 가능한 상황인지, 방사선 치료를 했을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화학요법을 견뎌낼만큼 환자의 건강상태가 양호한지에 대해 각 전문의들과 상담을 하고 최종적인 의사결정을 내려야한다. 하지만 암 진단을 받고 패닉상태인 환자가 이 많은 의사를 개별로 외래 예약하고 만나서 의견을 듣는 과정은 생각만으로도 힘이 빠질만큼 고통스럽고 지난한 과정이다. 지금 당장 너무 두려운 환자가 언제 예약날짜까지 기다릴것이며, 막상 만나도 의사가 말하는 생전 처음듣는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있는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이 과정은 환자에게 치료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고통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환자가 의사를 만나러 가는 방식이 아니라 반대로 의사가 환자를 위해 한곳에 모이면 어떨까? 예를들어 흉부외과, 방사선의학과, 의료정보학과, 종양내과 의사가 스케쥴을 맞춰서 환자를 위해 모여서 토의하고, 그자리에서 환자에게 한목소리로 최선의 치료방법을 제안한다면 환자 입장에서는 이 모든 고민이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환자는 한자리에서 질병의 원인, 현재 진행상태, 치료하기위한 전략,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을 한번에 각 진료과 전문의들에게 들을 수 있는 매우 효율적인 진료방식, 이것이 바로 '암통합진료서비스'이다.
다음 환자에 대해 논의중인 의사들 <암통합진료실>
필자는 이런 서비스가 병원에 있는지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처음 알았다. 그리고 UX 업계에서도 참고할만한 이런 훌륭한 UX디자인 사례가 이미 병원에 있다는것이 오아시스를 발견한것처럼 정말 반가웠다. 그런 반면에 매번 새로운 UX컨셉에 대해 안된다는 이야기만 듣다가, 이게 불가능하다기 보다는 의료진의 적극적인 의지가 있다면 이렇게 새로운 의료서비스를 만들어낼 수 있구나...라는 사실도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
사실, 이 제도는 메이요클리닉에서 처음 시작한 서비스였다. 이 좋은 서비스를 서울아산병원에서 도입하려 했으나 그당시 국내 수가체계에서 이를 도입하기는 쉽지 않았다. 통합진료를 위해 많은 의사들이 한자리에 모이려면 일단 진료비가 비싸질수밖에 없다. 병원 입장에서는 기회비용이 수가로 보상 되어야 하는데, 그때는 의사가 몇명이 모이든 1회 진료비로 수가가 책정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고자 담당 의사가 직접 보건복지부와 여러차례의 협의를 통해 통합진료 수가체계를 만들어서 지금의 암통합진료가 있을 수 있었다. 이때 만약 담당의료진의 열정이 없었다면 이 서비스는 국내에서 여전히 실현불가한 컨셉 수준으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UX디자이너가 스스로 이런 서비스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무리 병원에서 수십년을 근무해서 병원에대한 이해도가 높다고 해도 이런 서비스를 디자이너의 머리에서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필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의료행위를 하면서 발견되는 환자의 어려움은 오직 의료진만이 알 수 있다. 혹시나 UX디자이너가 의료진이 발견하지 못한 문제를 새롭게 발굴해서 문제를 해결한다고 할지라도 이를 해결할 의료적 해결방법은 의료진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다.
환자 약을 줄여주는 '노년내과'
국내에는 몇개 안되는 노년내과라는 진료과가 있다. 이곳에서 하는 역할중 하나는 노인들이 여러 병원을 돌고 돌면서 쌓인 수백페이지의 진료내역서를 보면서, 현재 먹고있는 누적된 수십개의 약중에서 먹지 않아도 될 약을 걸러내고, 하루 일과에서 노인이라는 특수한 컨디션의 사용자가 일상에서 어떻게 먹고 움직여야하는지에 대해 노인이 이해하기 쉽게 교육해주는 일들을 한다. 기존 방식대로 약을 처방하는데 중점을 두기보다 오히려 환자의 일상에서 덜 힘들도록, 더효과적으로 건강을 관리하도록 만들어주는 서비스는 의사만이 제공해 줄 수 있다.
수술실 공포를 줄여주는 '마취과'
수술실 안을 구경하고 싶은 환자는 없다. 하지만 봐야한다.
수술을 받기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거쳐야 하는 절차들이 있다. 우선 수술 하루전에 입원에서 금식부터 해야하고, 기본적인 검사를 받고, 의료진에게 직접 수술관련 설명을 듣고 수술동의서를 작성한다. 그런다음 예약된 수술시간이 되면 환자는 수술카트에 실려서 수술대기실로 이동한다. 이때부터 꽤 긴 시간동안 멍하니 수술을 기다린다. 그런다음 수술실로 이동해서 수술을 받게된다. 그런데 문제는 수술실에 도착하면 곧바로 마취하고 수술받는게 아니라는데 있다. 차디찬 수술침대위에 누워서 수술을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기다려야한다. 바쁘게 움직이는 간호사들의 대화소리, 수술상 위에 수술도구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금속이 부딪히는 차갑고 날카로운 소리, 수술실의 추운 에어컨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환자는 또 기다려야한다. 아마도 수술을 받아본 환자는 알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경험인지를... 그래서 한 마취가 교수가 수술 프로세스를 바꿨다. 환자가 수술실에 들어오고나서 마취하고 수술하는것이 아니라, 수술실에 들어오기 직전에 수술실 옆에 있는 전실에서 마취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되면 환자는 더이상 그 공포의 순간을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이미 수술실에 들어오기 전에 마취가 된 상태로 들어오기 때문에 수술 진행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다는 장점도 생긴다.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이지 않은가? 이건 제품/서비스 UX를 디자인하던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의 아이디어가 아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의료 프로세스 상에서 이를 실현시키는건 더더욱 어렵다. 수술프로세스 상에서 기본적으로 수술을 시작하기 전에는 엉뚱한 사람을 수술하거나 엉뚱한 곳을 수술하지 않기위한 타임아웃(Timeout)이라는 과정을 실행하도록 되어있다. 이때 의사 또는 간호사가 환자의 생년월일, 주소등을 환자에게 직접 물어보면서 수술환자가 맞는지 ID를 확인하는 하는데, 만약 이 타임아웃을 좁은 전실에서 수행해야 한다면 컴퓨터 환자ID화면을 확인하지 못하는등 여러가지 제약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마취를 하려면 환자상태를 파악하면서 환자의 마취상태를 모니터링하기위한 많은 기기들이 필요한데, 이 기기는 어떻게 이동할지, 그리고 환자가 마취상태이면 환자를 수술침대로 옮겨야 하는데, 이를위해 여러 의료진이 환자를 들어서 수술침대로 옮겨야하는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만약 환자가 100kg이상의 거구라면 상당히 문제가 된다)
전실은 공간이 비좁은데, 만약 환자침대때문에 수술물품 운반이 어려워지는 상황은 어떻게 대처할건지 등등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정말 많다. 이 모든 요청사항을 직접 조율하고 해결해야한다. 이해 당사자간의 조율은 정말 쉽지 않다. 담당 의료진의 강력한 의지가 필요할 수 밖에 없다. 이 모든 난관을 헤쳐가면서 아이디어를 내시고 직접 프로세스를 만드시는 교수님을 보면서 그당시에는 정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걸 UX디자이너가 할 수 있을까? 또는 UX디자이너가 이런 의료프로세스 변경을 제안할 수 있을까? 일반 제품/서비스 UX를 디자인할때도 UX디자이너가 개발자나 상품기획자에게 완전 X무시 당하는 상황이 있다. 개발이나 제품 특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 컨셉을 이야기할때이다. 보통 초보 UX디자이너가 이런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만약 의료진들에게 수술프로세스에 대해 안다면 얼마나 안다고 프로세스 변경을 제안하겠는가?...정말 의사 간호사에게 X무시 당하기 딱 좋다.
✅ 의료UX의 Grey Zone
병원에 온지 얼마 안되었을때는 UX디자이너가 중심이 되어서 의료진과 Co-Design을 통해 모든것을 디자인 할 수 있을꺼라 생각 했다. 의료진의 도메인 지식을 인터뷰를 통해 최대한 끌어내어 해결해야할 문제를 디자이너의 새로운 시각으로 재정의하고, 이를 UX디자이너의 창의적 솔루션으로 해결하는 멋진 그림을 꿈꿨다.
하지만 이건 착각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UX디자인은 사용자가 겪는 문제를 공감하는것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UX디자이너는 의료행위를 해본적이 없다. 할수도 없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공감하기 쉽지 않다. 아무리 하루종일 사용자를 Shadowing(따라다니며 관찰하기)하고 Video Protocol(비디오 분석)을 활용해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보통 UX디자인할때 대부분 당사자가 되어 직접 업무를 수행해보거나 사용해보는걸 최우선으로 한다. 그런데 이런 경험 자체가 막혀있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사용자가 아니라 관찰자 시점으로 디자인을 할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디자인의 Grey영역이 발생하게된다.
결론적으로 병원UX에는 기존의 제품/서비스 UX디자이너가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의료영역의 경험디자인은 의료진이 직접 디자인하는 수 밖에 없다. 본인처럼 병원을 이해하고 있는 병원UX디자이너의 역할은 의료UX아이템과 컨셉을 발굴하는 단계가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것처럼 의료진이 환자중심 철학으로 만든 초기 프로토타입 형태의 서비스만든 초기 컨셉개발 단계에서, 실제로 지속가능한 서비스가 될 수 있도록 UX관점에서 쉽고 편하게 서비스를 Well-Making 하는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료UX디자인이 필요한 지금의 Grey영역은 정말 많다. 이 영역은 오직 의료진만이 발견하고 해결할 수 있다. 이를 그대로 놔두면 결국 지금의 환자의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운 치료 경험은 지속될 수 밖에 없다.
✅ 의료UX의 Grey Zone을 위한 해결책
의대, 간호대에서 UX 개념을 필수로 가르쳐야 한다.
우선 모든 의사,간호사가 의료에 UX가 필요하다는것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UX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한다.
의사, 간호사가 의대,간호대에서 또는 병원내 교육센터에서 UX디자인 교육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의료 현장에서 필요할때 언제든 의료UX 컨셉을 만들 수 있는 수준까지 가르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문제를 공감하고 새롭게 정의해서 새로운 관점의 해결책을 컨셉으로 만드는 디자인씽킹을 알아야 하고, 또한 사용자가 인지적으로, 인체공학적으로 실제로 사용할 수 있을만한 제품/서비스 컨셉을 만들기 위한 HCD(Human Centered Design)개념을 배워야한다.
의료UX 컨셉을 실제 제품/서비스로 만들기위해 UX디자이너와 협업해야 한다.
임상현장에서 근무하는 의사 간호사는 너무도 바쁘다. 그래서 UX디자인의 디테일까지 챙기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실제 상품화 될때까지 개발이슈나 QA(Quality Assurance)이슈등 모든것을 챙기는것은 불가능 할 뿐 아니라 컨셉을 실제로 상품화수준까지 만들어서 제품/서비스화는것은 UX/개발의 전문영역이다. 만든다고 사용자가 의도대로 구매하고 설치하고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UX디자이너와 협업 해야한다. 하지만 지금은 병원에서 UX디자이너와 협업하고 싶어도 마땅한 방법이 없다. 외주 인력을 활용하고 싶어도 기본적으로 병원을 이해하는 에이전시도 부족하고, 비용도 적게 들지 않는다.
그렇기때문에 필자가 생각하는 UX협업구도를 만들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UX디자이너를 영입해서 병원UX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영입할 사람은 스타일링 위주의 디자이너가 아니라 UX기획자가 적합하다. 문제를 정의해서 문제를 해결할 UX컨셉을 디자인하고, 이를 실제 제품/서비스로 구체화 시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하며, 이를 개발하고 상품화해서 마켓에 출시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