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 그 곳.
또 그곳의 꿈을 꿨다.
그곳은 내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사랑하는 곳이었고,
내게 가장 익숙한 곳이며, 내가 가장 깊은 좌절을 배운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사람들은 집이라고 불렀다.
자그마치 18년이었다.
그 시간은 8살이던 소녀를 26살의 청년으로 만들었다.
나는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중학교를, 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자퇴를 했다.
그곳에서 나는 학생이었고, 연극 배우였으며, 그저 알바생이었다.
그곳에서 내 동생들은 태어나, 고등학생이 되었다.
나는 어쩌면 그곳이 내 끝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떤 이유로 그곳을 떠나도 곧 그곳에 돌아가게 되었으며,
친구들끼리 우스갯 소리로 내가 그곳의 지박령은 아닐까 하는 농담도 할 정도였으니.
나는 그곳을 증오했고, 또 사랑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그 곳에서 살았고,
너무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누구나 겪지 않아도 될, 그런 많은 일들을,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겪어내야 했다.
가령, 학창 시절 내내 있었던 은따라던지
새아버지의 알콜 중독으로 인한 매일 같은 전쟁들,
우릴 친아빠에게 보내겠다며 짐을 싸라 했던 엄마의 목소리,
그 곳에서 커가는 어린 동생들,
집 나간 오빠 대신 했어야 하는 첫 째의 행동들,
스무 살, 집을 나가겠다 내게 말하던 엄마의 얼굴,
집 나간 엄마 대신 돌보아야 했던 동생들과 술에 취한 새아버지,
그로 인해 포기해야 했던 연극,
22살 생일 날 있었던 새아버지의 성추행과 성희롱,
그런 새아버지에게서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
내 방에 셋이 잘 잠기지도 않는 방문을 두고
취한 아빠를 자극할까 눈치보며 지냈던 날들,
자기 입맛대로 알콜중독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던 아빠를,
보호자의 자격으로 보호입원 시켰던 날,
그 날 아침 내가 부른 119와 아빠가 부른 112가 만났던 아파트 주차장,
병원에 들어가기 싫다며 제발 자신 좀 감옥에 보내달라 애원하던 아빠,
매일 같이 받던 부모님의 빚 독촉들,
가스가 끊겨 찬물로 샤워를 해야했던 1년,
결국은 경매에 넘어가 집에서 쫓겨나던 날,
서툴지만 고요히 피어나던 무대 위의 열아홉 나, 스물의 나,
제발 좀 나를 죽여달라 매일 밤을 목놓아 빌던 초등학생의 나,
끓어오르는 청춘에 매일 밤 다 헤져버린 대본을 끌어안고 몰래 울던 나,
그 외의 아주 많은 것들을, 모두 그 집에서 겪어냈다.
그 집에서 보냈던 마지막 날 밤,
나는 좋아하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다짐했다.
내가 이 생을 죽지않고 버틴다면
꼭 성공하겠노라고.
성공해, 꼭 다시 이 집에 돌아오겠노라고.
다시 이 집에 돌아오는 날
그 밤에 다시 이 곳에서 이 아이스크림을 먹겠노라고.
또 그곳의 꿈을 꿨다.
집과 관련된 꿈을 꾸면, 어김없이 배경은 그곳이다.
나는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그곳을 증오했고, 또 사랑했다.
그곳은 내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사랑하는 곳이었고,
내게 가장 익숙한 곳이며, 내가 가장 깊은 좌절을 배운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사람들은 집이라고 불렀다.
#이소서 #에세이 #트라우마
2025. 06.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