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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연못 Aug 14. 2023

20년, 30년, 여행이 즐거워지는 관계로 깊어지기를

epilogue 

주말은 아침이 있었는지 깨달을 새 없이 오후가 되었다. 엄청난 강행군을 하고 온 것도 아니었는데, 도저히 일어날 여력이 없었다. 그저 7시간 시차가 나는 곳에서 7일 정도 지내다가 12시간 걸려 비행기를 타고 온 것뿐이었는데, 몸은 녹초가 되어있었다. 예전에는 출근 전날 저녁에 도착해서 다음날 회사에 가는 것도 문제없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주말 이틀을 꼬박 충전에 사용하고서야 겨우 출근을 감행할 수 있었다. 


이틀을 집에서 굴러다니는 동안 우리는 완전히 일상으로 되돌려졌다. 익숙한 배달음식을 시키고, 빨래를 하고, TV 앞에서 혼이 나간 사람처럼 넋 놓고 있는 동안 여행은 점점 지난밤 꿈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몇 달을 설레하며 준비하고, 몇백만 원을 아낌없이 흩날리며 다녀온 시간이 마치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혹은 실제로 있었던 것 맞나 싶을 정도로 사라져 간다는 느낌을 받아들이고 있자니 무언가 조금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이 여행에 무엇을 바랐을까? 부부가 된 지 10년 차가 되었으니 기념할만한 거한 이벤트 하나를 마련한다는 의미로 충분했을까? 둘 다 게시물 올리는 SNS도 없으니 딱히 예쁘게 기록될 만한 공간도 없는데, 부지불식간에 휘발되어 버리면 너무 헛헛한 것 아닐까? 갑자기 부정적인 꼬리를 물기 시작한 생각은 한 발 더, 한 발 더 시니컬한 쪽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솔직히 이 여행 하나에 그렇게까지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를 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도. 


생각은 이내 방향을 틀었다. 약 9년 정도 둘이서 가장 가까운 사이로 살아오면서 참 감사한 일이 많았다. 비록 거대하고 화려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늘 둘이 즐거워하며 지낼만한 자그마한 공간과 여유가 있었다. 반복되는 싸움과 포기를 거쳐 이해와 안정감도 생겨났고, 둘이서만 누리는 쉼과 재미도 만끽할 수 있었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매일매일 비슷한 일상을 버티는 가운데에서 며칠의 짧은 일탈이 주는 달콤함도 가끔씩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무탈하게 몇십 년을 함께 더 지내고 생을 마감하면, 행복한 마무리를 하는 것이라고 종종 생각했다. 


이번 여행은 며칠의 짧은 일탈 중 하나였고, 이 일탈은 우리가 열심히 살아온 동시에 행복하게 잘 지내왔기에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다른 하루하루의 일상에 비해 가성비가 심하게 차이 난다 해도 상관없는 특별한 시간. 여행이 끝난 이틀 뒤에는 마치 휘발되는 것 같이 느껴지겠지만, 2년 뒤에는 이상할 만큼 새록새록 떠오르게 될 특별한 시간. 그래서 둘 사이의 추억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둘이 함께하는 행복을 더  또렷하게 만들어줄 특별한 시간. 



사실 둘만 하는 여행은 인원수에 비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여행하는 내내 단둘이 가장 긴밀하게 시간을 공유해야 하기에 그 어떤 여행보다도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중요해진다. 제3의 중재자 혹은 완충지역이 부재한 온전한 둘만의 여행은 내밀한 깊이까지 다가가거나 진절머리를 피하기 위한 거리까지 멀어지거나 하는 양극단을 오가기 쉬운 구조이다. 이 위험천만한 구조 속에서 좋은 의미로 특별한 시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타이밍도, 기념품 하나를 고르는 시간도 서로가 상대의 마음에 공감하며 함께 기분 좋은 시간을 만들어갈 수 있어야 두 명 모두에게 즐거운 여행이 된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이 합해지는 순간이 많을수록 여행은 더 특별해진다. 


이번 여행이 또 하나의 특별한 추억이 되어 감사했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함께 즐기는 순간을 더 많이 공유하며 소중한 여행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의 굴곡과 비슷한 여정 같기도 해서 재미있었다. 긴장감이 저변에 깔려있던 초반 파리 일정을 거쳐 안정감으로 편안해진 바르셀로나에서는 일정을 마음껏 즐기게 된 흐름이 둘이 함께한 지난 9년여의 시간 같았다. 사랑하지만 낯선 둘의 일상이 부딪혀 만들어낸 긴장과 불협화음을 거쳐 이해와 받아들임으로 편안해진 둘의 결합이 기존과 다른 행복의 일상을 자아내게 되기까지 천천히 걸어온 여정과 왠지 비슷하게 느껴졌다. 


20년 차 부부일 때에도 바르셀로나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쯤이면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완공되지 않겠냐는 얘기와 함께. 그때는 여행하는 동안 이번보다 조금 더 자주 쉬고, 여행의 앞뒤로 더 많은 충전의 시간을 가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서로를 살피고 이해하며 위하는 마음과 행동은 조금 더 자연스러워져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둘의 여행이 지금보다 더 즐겁고 더 특별해질 수 있도록. 다음 10년을 또 열심히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가다 보면 그런 여행을 경험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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