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저녁 늦게 출발했다. 하루가 온전히 남은 우리는 느긋하게 남은 여행을 즐기기로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요 며칠간 누린 감정을 마지막까지 안전하게 간직하고 싶었기에 분주함 따위로 어그러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방구석보다는 도시의 공기를 더 오래 만끽하고 싶었기에 적당한 시간에 일어나 캐리어에 부풀 대로 부푼 짐을 구겨 넣고는 호텔에 맡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와 추로스로 시작했다. 평일 아침,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적하게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하는 것은 평범한 직장인에게 묘한 쾌감을 선사해 주었다. 아쉽게도 추로스는 별로였지만. 오전 나절을 보내기 위한 카페인을 섭취한 뒤 '카탈루냐 음악당'으로 향했다. 여행 전까지 갈까 말까 고민한 곳이었는데, 파리에서 '오페라 가르니에'에 크게 감명받았던 아내는 긴 고민의 종지부를 찍고, 이곳도 마지막 날 가보는 것으로 마음을 정하게 됐다. 하지만 방문한 결과는 다른 의미로 인상적이었다. 오페라 가르니에 같은 웅장함과 화려함을 기대하고 간 것은 크나큰 실수였고,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아서 관람 시간도 예상보다 훨씬 짧게 끝이 나버렸다. 애초에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방문한 것이 잘못이었다.
음악당에서 실망한 마음을 구시가지의 골목길 탐방으로 충분히 달래고는 잠시 추가 카페인을 섭취했다. 바르셀로나의 구시가지는 여전히 매력적이었고, 골목골목 안에 있는 작은 가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웬만한 유명 관광지를 보는 것보다 더 좋았다. 신혼여행 때 샀던 그릇의 짝을 찾기 위해 똑같은 그릇 가게에 들러 말도 안 통하는 할머니에게 이곳에서 산 그릇을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다며 사진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정겹게 그릇도 구매했다. 골목길 탐방의 종착지는 보케리아 시장이었지만, 입구부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옆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마시며 쉬어가기로 했다.
이제 마지막 날의 하이라이트를 남겨두고 있었다. 이번에 꼭 다시 가고 싶었던 곳 중 하나. 9년 전 신혼여행 때 잔뜩 기대하며 처음 먹었던 빠에야라는 음식에 너무 실망했던 우리에게 빠에야에 대한 매력을 제대로 알게 해 준 식당이었다. '칸 솔레'. 1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그 식당은 우리에게 '빠에야라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라는 깨달음을 주었고, 이후 우리의 여행 얘기에서 빠지지 않고 자주 언급되는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참 좋아했는데, 어쩌면 이것이 가고 싶었던 더 큰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진 속의 우리는 정말 밝게 웃고 있는데, 그 사진을 보고 있으면 그날의 음식도, 친절하게 서빙하며 사진을 찍어주시던 나이 든 할아버지도, 기분 좋았던 여행의 순간도 모두 떠오르곤 했다. 지금도 그 사진은 내 지갑 속에 들어있다.
우리는 전날부터, 심지어는 한국에서 여행을 계획할 때부터 칸 솔레에 가는 것을 상상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10년 전에 신혼여행 때 왔었다고 얘기하자." "그래야지. 그때 찍은 사진도 보여주자." "거기서 다시 또 사진도 찍자. 너무 의미 있을 것 같지 않아?" 오래된 식당 하나가 이렇게까지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이렇게 신나는 마음으로 찾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기도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식당에 들어갔다. 서빙하시는 분은 다른 분이었다. 이번에도 나이가 어느 정도 있으신 분이었지만 9년 전 그분은 아니었다. 그래도 활기차게 웃으며 맞아주시는 모습에 괜히 뭔가 뭉클했다. 음식을 주문하고는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 사진도 보여주면서 신혼여행 이후 10년 만에 왔다는 이야기를 어찌어찌 전했다. 아저씨는 재미있다는 듯이 사진과 우리를 번갈아 확인하고는 정말 여기가 맞다면서 동료까지 불러 웃으며 좋아했다. 그리고는 사진 속 우리를 '베이비'라고 부르며 같은 사람 맞냐고 굳이 확인도 하셨다. "우리 그렇게 늙었나?"라며 한바탕 웃고는 예전처럼 사진을 부탁했다. 안타깝게도 왠지 어색한 이번 사진은 간직하고 싶지 않게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이 모든 상황들이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즐거웠다. 음식은 여전히 맛있었고, 왠지 더 정성스럽게 서빙해 주시는 듯한 모습에 몽글몽글한 감정들이 식사 내내 가득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준비가 다 된 것 같았다. 남은 오후는 이 마음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근처 해변과 몬주익 언덕 등을 찬찬히 걸으며 공항으로 향할 일만 남아있었다. 우리의 풍요로웠던 여행이 마무리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