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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연못 Aug 14. 2023

여운을 나누기에 알맞은 장소와 시간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는 늘 분주했다. '마지막 면세점'이라는 타이틀이 왠지 모르게 압박을 주는 요인이 되곤 했는데, 미뤄두었던 지인들의 선물 생각부터 혹시 모를 마지막 득템에 대한 상상까지 분주함을 부추기는 요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까사 바트요' 옆에 위치한 몇백 년 된 초콜릿 가게에서 간단힌 선물을 해결하려던 계획이 틀어진 참이었기에 분주함은 배가 되었고, 공항 면세점을 구석구석 돌고 돌아 비싸지 않으면서도 괜찮아 보이는 그저 그런 선물들을 간신히 구입하고는 마침내 바르셀로나를 떠날 수 있었다. 


늦은 밤 출발한 비행기 안에서 약 12시간 동안 꼬박 자리에 앉아서 자고, 먹고, 뒤틀고를 반복한 끝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여행이 끝났다는 아쉬움, 익숙한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 등의 감정이 뒤섞이는 순간이었고, 이 감정을 그나마 특별한 장소인 공항에서 조금이라도 더 느끼면서 천천히 여운을 달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느 식당에서 간단히 음식이라도 시켜놓고 요 며칠 꿈처럼 지나간 여행 얘기를 나누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직 햇살 가득한 오후였고, 내일은 푹 쉴 수 있는 주말이 남아있는 시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었다. "도착했다"라는 말과 함께 최대한 빠른 경로를 찾아 공항을 빠져나가고 있는 아내에게 이런 마음을 전달할 겨를은 없었다. 심지어 택시까지 동원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빠르게 집에 도착하고야 말겠다는 각오 앞에 물렁하기 그지없는 감상을 감히 내세울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오랜 비행으로 지쳐있기도 했고, 어제부터 혼자 있을 고양이가 걱정되기도 했기에 귀가를 서두르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껏 인천공항을 벗어난 기록 중 최단 시간을 경신하며 스프린트 하듯 치고 나왔다. 


집에 도착한 직후도 감상을 나누기에 적절한 타이밍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쉴 틈 없이 여행 가방을 바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보통 짐을 쌓아두고 있는 것을 싫어했기에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짐을 정리하곤 했고,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항에서 나올 때는 내가 '이렇게 빨리?'라는 마음을 가졌다면,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정리할 때는 아내가 '이렇게 바로?'라는 내색을 비추는 양상이었달까. 그렇게 '여운' 따위는 어느새 증발되고 사라져 버린 감상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정리가 끝나고 떡볶이까지 배달시키고 나니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일상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우리가 이번주에 여행을 갔다 온 것인지, 일주일 내내 출근을 했다가 쉬고 있는 것인지 잠시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을 맞닥뜨리며 살짝 웃음도 났다. "너무 좋은 시간이었어." 일부러 다시 여행을 떠올렸다. "나도 정말 좋았어." 한 사람은 여행지에서 사 온 자석들을 냉장고에 붙이며, 다른 한 사람은 기념품과 선물들을 모아놓고 사진을 찍으며 이야기를 던졌다. 


진즉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여운이 틈새를 찾아 피어올랐다. 공항에 있는 식당은 아니었지만, 이미 여행지에서 입었던 옷들이 세탁기 안에서 그곳의 향취를 잃어가고 있었지만 충분히 괜찮았다. 두 명 모두 분주함을 해결한 뒤 잠잠해진 이 순간이 여행의 여운을 느끼기에 최적화된 타이밍이었다. 괜히 여행 기분을 더 느끼고 싶다며 공항에서 고집을 부렸다면 지쳐 있는 상대방의 기분만 더 날이 서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저런 짐들을 정리한 뒤에 여행지의 물건들을 꺼내놓고 보니 떠올릴 수 있는 이야깃거리도 더 많은 것 같았다. 


우리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무사히 서로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은 채 아름답게 10주년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다음 20주년 여행을 기대하기에 충분할 만큼 감사한 마무리였다. 그리고 서로가 함께하는 시간이 조금씩 더 깊어지고 소중해진다는 생각에 한 번 더 감사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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