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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채원 Feb 13. 2020

창작자와 평론가 사이

제작 일기

MBC 교양 피디들 사이에서 항상 창작자는 적고, 평론가들은 많다는 점을 나는 우리 조직이 안고 있는 기형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날카로운 비평적 시선으로 동료들의 프로그램 질적 향상에 도움을 주느냐. 내 대답은 '전혀'다. 전혀 그렇지도 못한 채, 자기 말만 하는 평론가들만 늘어나고 있다. 때로는 맥락과 맞지 않는 얘기로 본질을 흐리거나 지엽적인 부분을 침소봉대하거나 감정싸움 비슷하게 번져버리는 일도 가끔 일어난다. 내가 더욱 끔찍하게 느끼는 리뷰는 문화방송 직원인지, 창작과 비평 직원인지, 세세하게 내레이션의 단어와 문구를 지적하는 문예비평적 태도다. 나는 이런 태도들이 다 이론적 무능력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피디들이 프로그램 만들기에 급급해서 다큐멘터리 이론이나 편집 이론 등을 등한시하는 태도가 이 무능력의 토대다. 이론을 모르기에 본 대로 찍으며, 본 대로 찍기에 급급하니 이론적 소양을 쌓을 시간이 없다. 영상 이론을 모르면서 영상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이율배반의 모습이 교양 피디들의 특질이 아닐까 싶다. 나 또한 파업과 유배 중에 <커팅 리듬>, <다큐멘터리> 등의 고전들을 구입해서 읽어봤지만 다큐멘터리 제작은 워낙 급박한 상황이기 때문에 평소부터 염두에 두지 않으면, 상황 내에서 적용하기 쉽지 않다는 점을 수시로 깨닫는다. 날이 선 제작의 길을 걸으면서 이론에 대한 공부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니, 창작의 길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일전에 본 프로그램의 프롤로그 부분에서 소위 '갬성'적으로, 기법적으로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위화감의 근원은 무엇일까? 나는 프롤로그에서 사용된 '보이스 오버' 부분이 가장 첫 번째라고 생각한다. 보이스 오버는 쉽게 말하면 다큐멘터리나 극영화에서 잘 짜인 피사체(주로, 인물)가 찍힌 비디오 트랙 위에 해설자의 오디오 트랙이 흐르는 기법을 말한다. 그래서 피사체가 처한 외적 상황 혹은 심리상태를 부연해주는 역할을 한다. 고전 극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는 전지적 시점의 해설자가 이 역할을 했다면, 현대에 와서는 연극에서 '방백'처럼 피사체의 목소리를 먼저 픽업해둔 다음에, 피사체의 비디오 트랙 위로 흘리도록 한다. 여기서 내가 느낀 위화감이란 이 피사체 위로 흐르는 오디오 트랙의 주인공이 피사체 자신도 아니요, 해설자도 아닌 대통령과 관료였다는 점이다. 비디오 트랙과 연관이 없는 오디오 트랙을 사용할 때, 이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대통령, 관료의 모습을 다룬 비디오 트랙의 인서트 컷이다. 보다 세련되게 표현하려면, 주인공이 타고 있는 지하철의 안내 창에서, 혹은 지나가는 지하철의 풀샷 밖으로 저 멀리 비치는 전광판 등에 삽입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무심한 관료와 일상의 찌든 서민의 이미지 간의 병치를 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당 프로그램의 프롤로그에서는 단순히 '자막'으로 처리해버렸다. '비디오 우선'이라는  TV의 원칙이 너무나 쉽게 흩뜨러져 버린 것이다. 이 프롤로그에서 보이스 오버란 이론을 체화해서 다양한 맥락에서 실천적으로 적용하고, 그런 경험을 통해 기법으로 전유된 것이 아닌, 소위 '컷 앤드 페이스트' 방식의 무 맥락적인 기법의 모방일 뿐이다. 


게다가 피사체로 선정된 주인공이 단순한 재연 배우였다는 사실 또한 나로서는 그 의도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대개 프롤로그의 주인공이라면 전체의 주제의식을 통괄하는 '대표성'을 지닌 인물이어야 했다. 정말로 먼 수도권 도시에서 고단한 통근길을 감행하는 인물이 재연배우라니! 실제의 인물도 아닌 가상의 인물이 대표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의무는 시청자들에게 끊임없이 '실제 상황'임을 알려야 하는 강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먼 길을 통근하고, 길에서 시간을 버리고, 그래서 정부의 정책에 비판적 시각을 가진 사람의 이미지와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 전달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프로그램을 하는 이유가 아닐까? 나는 이 프롤로그가 사소해 보이지만 치명적인 데서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그저 도제식으로 학습하고, 이심전심으로 전수하고, '같이 고생하는 사람들끼리 왜 이래?" 하며 감성적으로 해소한다면, 그런 조직에서 어떤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평론가질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창작자에게 비평적 시선은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선을 유효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또 끊임없이 무언가를 산출해내야 한다. 좋은 비평적 시선은 제작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제작 경험은 그에 후속되는 이론적 성찰들로 보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평론가도 아닌 문예 없는 문예비평가, 더 나쁘게 말해 '훈수꾼'으로 전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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