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만으로는 어떻게 안되나요
누군가를 소개받을 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다. 이만하면 괜찮다, 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걸까?
수도권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그런 회사를 다니고, 호감형 외모인 사람 ㅡ이면 '이만하면 괜찮다'는 합격선일까. 덧붙여 요즘은 남자든 여자든 '집'이 있다는 것이 일종의 프리패스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20년 지기 친구들인 정희와 민혁이를 만나 함께 술 한잔을 했다. 정희는 언제나 사랑이 넘치는 사람답게 새로운 설레임을 만끽 중이었다. 그녀는 가게에 들어올 때 부터 온 몸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민혁이는 5년 넘게 만난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최근 결혼 이야기를 하다 크게 다툰 후 아직까지 냉전 중이라고 했다.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자 시시콜콜한 안부 이야기에서 좀 더 깊은 대화로 이야기가 옮겨갔다.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민혁이가 소주를 입에 털어놓곤 한숨을 깊게 내쉰다.그는 중소기업에서 7년 째 근무 중인데, 급여가 많진 않지만 그렇다고 적은 편도 아니었다. 집안도 평범했다. 큰 부자는 아니지만 또 크게 가난하진 않은 집안의 차남. 어릴 때부터 참 성실했고 꾸준한 친구였는데 '결혼'이라는 장벽 앞에 자존감이 많이 낮아진 모습이었다. 결혼 후 살 집이 첫째 문제이고, 현재 부모님 집 대출금을 민혁이가 일부 갚고 있는데 그것도 걸림돌 중 하나였다.
사랑하는 것만으론 되지 않는게 결혼이더라
씁쓸한 그의 읊조림이 그 시끄러운 술집에서 나에게 너무나 크게 들렸다. 섣불리 그를 위로하지 못했던 이유는 민혁의 마음 뿐만 아니라 그녀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릴 땐 평생 함께 할 정도로 사랑하기만 하면 결혼을 할 수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결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은 그보다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른들이 멋모를 때 결혼 안하면 못한다고 한 말이 다 이유가 있구나 싶다.
나이가 들고 나만의 주관과 가치관이 뚜렷해 질수록 나와 다른 타인을 포용하고 함께 하는 삶을 계획 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살면서 그 사람의 단점만 눈에 밟히더라도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자신이 없다면 결혼생활을 이어가기 어렵다. 결혼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헤어지기 싫어 평생을 함께 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이자 개인의 결심이다. 그러나 그 단순한 것들 사이 사이에 욕심, 욕망이 끼어들어 결혼이라는 것이 복잡해지고 누군가에겐 피해가고 싶은 하나의 제도에 지나지 않기도 한다.
신파 가득한 드라마 혹은 주위 현실에서 흔히 듣는 말 중 하나가 결혼을 원하는 여자에게 남자가 '아직 나는 준비가 안됐어 돈을 더 모아야해 ' 하고 말하는 것이다. 준비라는게 과연 끝이 있을까? 얼마를 모으고 갖춰야 '결혼'할 수 있는 기준을 충족하는 것일까. 반대로, '사랑'만 있으면 돼 라고 자신하는 사람들이 정말 지극히 인간적인 현실의 압축판인 '결혼'을 버텨낼 수 있을까? 사랑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 했더라도 살면서 닥치는 여러가지 현실적인 문제 앞에 예민해지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예민함이 자라나면 서로에 대한 원망이 되고 불평으로 자리 잡는다.
생각해보면 민혁의 그녀는 솔직한 것이었다. 본인이 결혼생활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우선순위, 즉 안정적인 라이프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고 그 욕망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것이 어정쩡한 고민을 하며 온라인 커뮤니티에 '어떻게 해야 하나요? 결혼 해도 괜찮을까요? 하고 묻는 사람들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냐, 돈이냐 하는 문제는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와 비슷한 무게를 갖고 있다. 사랑이라고 하면 꽤나 그 만남이 진정성 있게 보인다. 그렇다고 '돈'이 중요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속물이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생각하는 배우자의 기준과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배우자의 기준은 같을 수 없다. 결국, 선택의 문제다. 그렇기에 민혁에게도, 내가 만약 그녀를 만난다면 그녀에게도 어떤 위로나 조언을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열렬한 사랑파인 정희는 민혁에게 "야, 그냥 이 여자 내가 책임진다! 이런 마음으로 여친에게 믿음을 줘. 어떻게든 내가 먹여 살린다!' 이런거 말이야"하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대꾸했다.
"누가 누굴 책임지냐. 서로 서로 기대서 같이 살아야지. 같이 먹고 살아야지 한사람이 어떻게 먹여 살리냐? "
퉁명스러운 내 말에 살짝 빈정이 상했는지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나를 흘겼다.
"내 말은, 민혁이가 꼭 집이 없어서 여자친구가 결혼을 고민하는게 아닐거라는거야 너가 평생 함께할 자신을 여자친구한테 못 보여줬을 수도 있지 않아? 여자는 뭐 준비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들 다 핑계로 들린다구"
바싹 익힌 마늘을 집어먹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럴수도 있겠구나. 어쩌면 이건 그녀 자신에 대한 애정의 깊이를 확인하고 싶은걸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적으로 A 아니면 B만 생각했던 내가 참 감정적으로 단순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이래서 내가 새로운 연애 따위는 시큰둥 한걸까?
반만 채워진 소주잔을 입에 털어넣으며 민혁이 말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나도 여자친구한테 아쉬운 부분이 있지. 왜 마치 내가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을 느껴야 하나 싶은거야. 하지만 이것저것 따지고 거르다보면 정작 왜 우리가 결혼하려고 하는지가 없게 되는거잖아. 인연이면 가는거고 아니면 끝나겠지. 대부분 너무 애쓸수록 다 멀어지더라. 모래알을 주먹에 꼭 쥐고 있을수록 모래가 더 빨리, 다 빠져나가는 것처럼"
정희가 민혁의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네 마음 가는대로 해. 주위 사람들 이야기 듣지 말고, 어정쩡하게 타협하지 말고. 분명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나 불행은 있을거야. 어느쪽의 후회와 불행을 너가 더 감당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행복에 대한 사람의 기대치는 끝이 없으니까"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씩씩한 정희의 목소리가 울렸다.
새로운 사랑도, 오래 함께하는 사랑도 현재 없는 내가 제일 속 편하네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