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피는 남자

사람은 고쳐쓸 수 없어요

by Lagom




아침에 눈을 떠보니 부재중 전화 기록이 세 통이나 남아있다.

새벽 2시부터 1분 간격으로 두번, 30분 후 1번. 정희다. 정희는 고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부산 집에 내려갔다가 어제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나도 며칠 전 장례식장을 다녀왔었다. 정희는 고모와 각별한 사이였기에 장례식장에서도 많이 힘들어했다. 서울로 돌아와 잠을 이루기 힘들었던 걸까. 무슨 일로 그 새벽에 전화를 했을까. 전화를 바로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출근 준비를 위해 씻고 나온 후에도 그녀의 연락은 없었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몇차례 더 전화를 해보았지만 그녀는 오전 내내 받지 않다가 점심시간이 되서야 전화를 받았다.


"정희야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

대답 없는 전화기 속에서 그녀가 울음을 삼키는지 끅끅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거, 보통 일이 아니구나.

"왜그래? 집이야? 내가 오후에 갈께"

"... 응 알겠어"


급하게 오후 반차를 내고 나는 정희에게로 달려갔다. 문을 열어주는 그녀의 눈은 밤새 울고 한숨도 못잤는지 퉁퉁 부어있었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녀가 나를 쳐다보며 이내 다시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그녀에게 물 한잔을 가져다 주며, 그녀의 감정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정희는 몇 개월 전, 그러니까 대략 6-7개월쯤 됐을 것 같다.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고 있었다.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상태에서 시작한 연애였던 만큼 그녀의 마음은 조금 남달랐던 것 같다. 남자도 정희에게 잘해주는 것 같았다. 늘 새로운 곳을 찾아 데이트를 했고 선물도 자주 주었고 여행도 함께 다니며 정말 오랜만에 '연애다운 연애'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희는 그에게 푹 빠졌고, 내심 그와의 미래도 그렸던 것 같다. 단 한가지 흠이 있다면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술을 좋아하는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술을 절제하지 못하는게 문제지. (나도 술을 좋아하기에....)

남자는 술만 먹으면 정희와 연락이 되지 않았고, 연애 초반에는 그 문제로 자주 투닥 거리긴 했으나 이내 정희가 그 부분은 포기하고 받아들인 것 같았다. 다 큰 성인이니 알아서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 믿음이 너무 컸던 걸까. 어제 새벽 사단이 일어났다.




장례식을 마치고 피곤했던 정희는 집으로 돌아와 바로 뻗었다. 저녁 즈음 일어나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는 회사를 그만 둔 친한 형을 위로해주기 위해 퇴근 후 술 한잔 가볍게 하고 들어갈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정희는 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악몽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 깬 시각이 새벽 1시. 휴대폰을 확인했으나 그의 연락은 없었다. 집에 들어가면 잘 들어갔다... 카톡 하나 좀 해주지 그게 뭐 어려운 일인가, 하고 투덜거리며 정희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신호가 몇 번 가더니 이내 뚝 끊겼다. 그녀는 같이 술자리를 했다는 친한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희도 같이 몇번 어울린 적이 있어서 마침 그의 번호가 그녀에게 있었던 것이다.

"아 상현오빠 안녕하세요 혹시 민준오빠 집에 잘 들어갔나요?"

"아 네네 정희씨 아.. 아까 택시타고 갔어요"

"아 그렇군요 연락이 안되서.. 또 뻗었나보네요. 감사해요"

상현이라는 사람도 꽤 술이 취한 상태였다. 횡설수설하며 정희 남자친구는 집으로 갔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정희는 자꾸 뭔가가 찝찝했다. 말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낚시바늘이 머릿 속 어디 한 곳에 딱 걸린듯, 지금 남자친구 집으로 가봐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 홀린 듯 그녀는 옷을 대충 걸치고 그 새벽에 택시를 타고 남자친구 집으로 향했다. 올림픽대로를 타고 가는 도중에도 그녀는 '내가 지금 뭐하는거야 참나...'하며 헛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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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도착한 남자친구의 자취집.

빌라 건물로 들어서 그의 집 앞에 도착하자, 현관 문 뒤에서 무언가 이야기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근처 사는 다른 친구를 불러서 또 술을 먹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문을 두드렸다. 그녀가 문을 두드리자 남자친구가 '누구세요?'했고 그녀는 '오빠 나야' 하며 문 손잡이를 돌렸는데,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는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을 보고 말았다. 자취방 침대에 이불로 반만 몸을 가린 여자 그리고 놀래서 뛰어나오는 정희의 남자친구. 사람이 너무 놀라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저 멍-해진다.

정희도 그랬다. 어... 어... 하는 사이에 남자친구는 문을 쾅 닫았고 걸어잠궜다.

몇 초의 정적이 흐른 후 정신이 들었는지 정희는 그때부터 미친듯이 문을 두드리고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몇 분 후, 정희 남자친구는 옷을 입고 나와 정희를 끌고 건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는 고주망태, 완전 취해 인사불성 상태였고 그와 입씨름을 하는 사이 그의 방에 있던 여자는 유유히 집을 나갔다.


물컵을 꽉 쥐고 이야기하는 정희의 분노가 나에게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화가 난 정희가 자취방으로 들어와 불을 켜고 보니, 더 가관이었다고 했다. 함께 찍었던 커플 사진은 싹 쓸어 책상 서랍에 들어있었고 침대는 어지럽혀져 있었다. 침대밑에는 그 여자것처럼 보이는 머플러가 있었다. 정희는 화를 풀데가 없어 그 빨간색 머플러를 가위로 미친듯이 잘랐다고 한다. 그는 술먹다 만난 친구인데 차가 끊겨서 잠시 우리집에 데리고 왔다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해댔단다. 그렇게 정희는 그 길로 헤어지자는 말을 남기고 그 남자 집에서 곧장 나왔다고 했다.


어렵게 그 이야기를 이어가는 정희를 나는 가만히 안아주었다.


"미친놈이네.. 쓰레기같은 자식. 차가 끊겼으면 택시비를 줘서 집에 보냈어야지 왜 자기 집으로 데려와?

같이 술마셨다는 그 형은 뭐야? 너도 아는 사이라며. 끼리끼리 논다더니... 괜찮아.. 더 좋은 사람 많아. 차라리 잘된거야"

정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이 남자가 바람핀게 처음은 아니라고. 몇 달전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 여직원과 몇 번 몰래 만났던 사실을 알게 됐었다고. 그 때도 그는 그 여자가 자기한테 너무 들이대서 어쩔 수 없이, 동료라서, 몇 번 밥 먹은게 다라고 둘러댔다고 했다. 정희는 그의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사랑했으니까, 사랑하니까 믿었다.


"정민아, 나는 이제 누구도 못 믿을 것 같아. 정말 온 마음을 다했는데...

그냥 있는 그대로, 서로의 믿음을 지켜주는 그런 사랑은 정말 없는걸까? 내가 너무 바보같은걸까...?"

정희는 나에게 안겨 아기처럼 울었다.


사랑이 끝난 슬픔에 흘리는 눈물이라기보다, 자신이 그토록 믿었던 믿음이 무너져버렸다는 사실이 더욱 그녀를 아프게 했다. 사람은 누군가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면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을 되찾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또한 방어적인 자세로 변하기 마련이며 다시는 누구에게 기대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러다 가끔 이번엔 뭔가 다르겠지, 생각하지만 이럴 줄 알았어, 하고 작게 내뱉는 한숨만이 남는다. 어제는 감동으로 와 닿았던 말들이 오늘은 거짓말처럼 느껴지고, 어떤 말이라도 믿고 싶었던 열정적인 마음은 시들어간다. 그 마음이 시들어가면 '사랑'을 다시 하긴 쉽지 않다.



정희의 휴대폰이 계속 울렸다. 남자친구였다. 자기가 정말 잘못했다고 다신 안그러겠다고 전화가 오고 카톡이 온다고 했다. 나는 정희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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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야. 내가 어릴 적 갖고 놀던 로보트가 있었어. 이름은 다간. 다간을 갖고 놀다 떨어뜨린 적이 있었지. 다간은 두동강이 났어. 난 그 부분을 잘 붙였고 다시 갖고 놀았어. 그런데 붙였던 부분이 또 부서지는 거야.

난 다시 붙였어 나에겐 다간이 전부였으니까. 그리고 나는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갖고 노는 법을 배웠지. 근데 또 부서졌어. 결국 그 다간은 버릴 수 밖에 없게 됐지. 그리고 새 로보트를 샀어. 그 이후부턴 굳이 다간에 집착하지 않았어. 세상에는 다간 말고도 로보트가 아주 많다는 걸 깨달았거든. 신뢰는 관계의 기본이고 그 신뢰가 무너진다면 다시 세우긴 너무 어려워. 알잖아 너도. 다시 쌓는 그 시간이 너를 좀먹게 할지도 몰라.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아닌 것 같아. 매정하게 끊어내는 것이 너를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해."


정희는 내 이야기에 끄덕였다. 나는 그녀를 꼬옥 안아주었다.

" 어른들 말이 깨진 그릇 붙여 쓰는거 아니라고.. 사람도 고쳐 쓰는거 아니다. 오늘의 이 기억, 이 감정 잊지마. 앞으로 네가 살아가기 위한 실마리가 될지도 몰라. 자 이제 그만 울고, 즉떡이나 먹으러 갈까? 사리 추가해서?"


정희는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앞으로 어젯밤 기억 때문에 끊임없이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때마다 트라우마처럼 그녀 머릿속에 거머리처럼 딱 달라붙어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주는 수밖에는 없겠지. 복숭아같은 그녀가 좋은 사람에게 듬뿍 사랑받고 또 한번 크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창 밖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몹시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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