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회사에 일러스트 구매하면서 반값 할인받은 사연
디자인을 의뢰받고 작업을 하던 중에 일러스트 구매 때문에 고객과 마찰이 생겼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기에 고민하다가 일러스트와 관련된 비용과 절차를 내가 책임지기로 했다.
일러스트 구매 절차가 간단치 않았다. 영국에 있는 회사였는데 일러스트 상세 설명 페이지에 가격이 매겨져 있지 않았다. 홈페이지에서 회원 가입하고 원하는 일러스트를 선택하고 문의 버튼을 누르자 잠시 뒤 메일이 날아왔다. 메일에 요청한 대로 사용할 매체, 사용 크기, 인쇄 부수, 출판하는 지역과 출판사 명 등등을 적어 보냈다. '과연 값을 얼마를 부를까?, 내가 감수할 수 있는 최대 비용은 얼마일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답을 기다렸다. 한국과 영국의 시차는 8시간. 한국은 저녁, 영국은 오전이었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일처리가 더디다고 하던데···.' 걱정하고 있는데 빠르게 답이 왔다.
내가 기대한 값의 정확히 두 배가 적혀 있었다. 이를 어쩐다···. 이 일러스트를 구매하지 못하면 디자인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이 일 외에도 해야 할 일이 줄줄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다시 메일을 보냈다.
- 빨리 답해줘서 고맙다. 그런데 내가 예상한 것보다 값이 비싸다. 내 고객과 의논해 보겠다.
혹시 값을 할인할 수 있는 예외적인 조항이 있는가? 이 책은 한국의 ○○분야 연구자들이 쓴 책이며 역시 이 분야 연구자들이 읽을 책이다. 대중적으로 많이 팔릴 책은 아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만한 예외적인 조항이 있다면 알려주기 바란다. (영어가 익숙지 않아서 번역기 도움으로 쓰고 있다. 혹시 의미가 이상하거나 무례한 느낌이 들더라도 이해해주기 바란다.)
4분 뒤 도착한 담당자의 메일
- 네 영어 실력이 내 한국어 실력보다 훨씬 낫다. 나를 위해 번역하는 수고를 해줘서 고맙다.
이해한다. 그냥 가지 않고 가격 협상을 요청해주어 고맙다. 우리는 항상 고객의 예산에 맞출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원하는 가격을 알려주면 내가 맞출 수 있는지, 아니면 최대한 근접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
뭔가 일말의 가능성이 열리는 듯했다. 나는 처음 내가 기대했던 값, 그가 부른 값의 절반을 써서 보냈다.
45분 뒤 다시 도착한 담당자의 메일
- 굳 뉴스! 출간 부수가 적다는 점을 감안해 그 값으로 승인을 받았다.
우리 웹사이트에서 신용카드, 직불카드, 페이팔 등으로 결제가 가능하다.
이대로 진행할지 의견 알려달라.
결제하고, 이미지를 무사히 다운로드하고 나서 담당자와 인사를 나누었다.
-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
- 네가 이미지를 얻을 수 있도록 내가 도울 수 있어 기쁘다. 또 다른 프로젝트 진행할 때 우리를 기억해주면 고맙겠다.
해피엔딩이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값을 통보받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 비싸구나. 어쩔 수 없구나···.' 하며 지레 포기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나는 (절박했기에!) 내 상황을 적절히 설명하고 '예외적인 조항'이 있는지를 물었고, 이 질문 덕분에 여러 가지 가능성이 열렸고, 결과적으로 원하는 값에 일러스트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질문의 기술을 ⟪그렇게 물어보면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김호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라는 책에서 배웠다. 이 책 첫 번째 꼭지인 “예외 사항을 물어본 적 있나요?”에서 저자는 사정이 생겨 계획했던 여행을 취소하며 있었던 일을 들려준다. 호텔 예약을 확정해 두었던 터라 취소하면 한 푼도 돌려받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저자는 이탈리아 호텔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호텔의 담당 지배인에게 제가 공손하게 전한 핵심 메시지는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내가 예약할 때 취소하면 돌려받지 못하는 조건으로 예약한 점은 잘 알고 있다. 이번 여행 스케줄에 대해 아내와 나 모두 확신을 했기 때문이다. 둘째, 아내 회사의 예상치 못한 급박한 일로 아내가 도저히 여행을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셋째, 내가 내야 할 위약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거나 전혀 내지 않게 예외 조항을 적용하도록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 부부가 다시 북이탈리아 여행을 하게 될 경우 꼭 당신 호텔에서 머물도록 하겠다.”(19쪽)
결과는 어땠을까? 호텔 측이 예외적으로 이 예약 건을 위약금이 전혀 없이 취소하는 것으로 해주었다는 놀라운 결말! 이 이야기가 너무 강렬해서 나는 질문하는 법을 이렇게 기억해두었다. '예외 사항이 있는지를 물어보고, 상대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겸손한 태도로 질문하기.' 이 방법으로 나는 아버지의 치과 임플란트 치료비 분쟁을 해결한 적이 있고, 같은 층 사무실의 소음 분쟁도 이 방법을 응용해 해결했다. 몇 차례 경험해보니 상대방이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위치에 서게 하는 '도와주시겠습니까?',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라는 말과 공손한 태도가 문제 해결에서 정말 중요했다.
이 글을 쓰면서 일러스트 구매 과정에 주고받은 메일을 다시 열어보니 내가 '예외 조항'을 묻는 과정에서 상대에게 도움을 청하는 공손한 뉘앙스가 좀 아쉬운데, 다행히 나를 상대한 담당자 길모어의 매너와 소통 능력이 너무 좋았던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사소한 실수로 물지 않아도 될 돈을 물었지만 머나먼 나라 사람과 메일을 주고받으며 소통한 경험이 그 값보다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