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n B

에필로그

by 채주원



어떤 목표를 가진 최초의 시점은 아마 초등학교 6학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당시 내가 살던 지역은 중/고등학교를 뺑뺑이를 돌려 거주지 기준 근거리 학교 중 랜덤 지정하는 시스템이었는데 나는 가고 싶은 학교가 있었다. xxx중학교를 들어가고 싶어서 얼마나 바랐던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어서 종교도 없으면서 온갖 신들께 빌었던 기억이 있다.

그 두서없지만 간절했던 기도가 먹혔는지 그토록 원하던 중학교에 배정되었고, 가고 싶은 학교였으니 우수 성적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입학시험공부도 정말 열심히 했었다. 그 열정은 차고 넘쳐서 가족 여행 가는 기차 안에서도 오버한다는 동생의 놀림을 귓등으로 들으며 공부할 정도였다.

덕분에 전교에서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등수로 입학하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수능을 볼 때까지 내게 목표는 좋은 성적을 받아 괜찮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그 외 다른 목표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하나만 바라보고 추진하는 삶의 방식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 연구소에 취직하고 대학원을 병행하면서 이직 준비를 할 때도 내게 목표는 늘 One and Only였다.

목표가 하나였으니 '그게 안되면'이라는 가정은 어불성설 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노력하는데 안될 수 없다는 맹목적 믿음과, 목표와 인생을 결부하여 안되면 끝이라는 극단적 불안은 나를 늘 절벽으로 밀어붙였다. 이 나이 먹고도 어떤 결과를 봐야 하는 시험을 난이도 상관없이 극도로 기피하는 것은 그 트라우마의 일환일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목표에 대한 가치관이 깨지게 된 계기가 생겼다.

연구소를 그만두고 계획대로 구직활동을 하던 중 내 계획에 어긋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때까지 운이 좋게도 (혹은 나쁘게도) 인생에서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 잘못이 아닌 타인의 잘못으로 인해 내 인생 계획이 어그러진 사건은 한동안 일상생활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그때 한 지인이 내게 Plan B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Plan A는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목표와 계획이라면, Plan B는 A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차선의 목표와 계획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 Plan A는 가지고 있고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Plan B에 대해서는 생각도 해본 적 없거나 딱히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 대부분 주요 목표 하나 세우고 추진하기에도 바빠 Plan B는 생각할 겨를이 없거나, 이를 염두에 두더라도 Plan A를 건성으로 하거나 계획대로 잘 되지 않았을 때 도망칠 곳 하나 정도로 생각할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의 목표와 계획만 가지고 있으면 너무 극단적으로 그것만 바라보게 되어 오히려 능률이 더 나지 않고, 나처럼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그것이 틀어졌을 때는 극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받는다. 반면, Plan B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갑자기 차가 고장 났을 때 당황하지 않고 바로 갈아탈 수 있는 스페어 차량이 한대 더 있는 셈이다. 너무 아끼던 페라리가 망가져서 마음은 아프겠지만 든든한 중형 세단이 한대 더 있으니 곧 마음을 털고 가려던 곳으로 다시 출발할 수 있다. 몇 년 전 한동안 화두였던 '회복탄력성' 역시 Plan B가 가지는 장점인 것이다.


그리고 Plan A와 B 둘 다 구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Plan A에 더 몰입하고 최선을 다할 확률이 높다. 하다가 안되면 B로 갈아타면 되니까 대충 해야지가 아니라, 이게 망해도 나는 갈 곳이 있다는 믿을 구석 하나 마음에 심어 놓으면 되려 A에 할 수 있는 한 원 없이 다 하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양관식이 금명이에게 말하곤 했던 '수 틀리면 빠꾸' 같은 거다.


당시 충격에 휘청이는 나에게 '인생이 얼마나 다채로운데 하나의 목표와 계획에 목숨을 걸듯 사느냐'는 지인의 질문은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항상 Plan A와 B를 모두 준비하기 시작했다. 언제든 수 틀리면 빠꾸 해서 추진할 수 있는 Plan B는 오랫동안 내게 든든한 믿을 구석과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내심 마음 한 구석에서는 Plan B가 가동될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은근히 고지식한 구석이 있는 나는 촌스럽게도 Plan A 대로 흘러가는 삶을 여전히 가장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인생 처음으로 Plan B를 가동하는 시점이 왔다.

오지 않길 바랐던 일이지만 덕분에 퇴사라는 중대 결정을 내리고도 심리적 요동이 크지 않았고, Plan B 대로 진행될 인생도 꽤나 두근거리고 멋질 거라는 생각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마음이 마냥 무겁진 않다.


Plan B로 열어갈 인생 2막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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