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009 #알렉산드르_솔제니친
작성 : 2020년 12월 31일
계기
러시아 문학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솔제니친은 꼭 읽어보고 싶은 작가였다. 이 책 전에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는 책을 한 챕터 정도 읽었다. <수용소 군도>를 읽고 싶긴 했지만 너무 어렵고 두꺼웠다. 레닌과 스탈린이 저지른 범죄와 이런저런 혁명 등의 러시아사가 나한테는 조금 생소하고 어려웠다. 그래서 솔제니친의 데뷔작인 이 책을 먼저 읽어보고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 책은 <생각정리스킬> 일기 부분에서도 언급이 됐었다. 고작 하루의 이야기를 한 권의 소설로 풀어쓴 것이 대단하다고 저자는 이야기했다.
느낀 점
이 책은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내가 게으른 것도 있지만 읽기가 어려웠다. 소련의 그 끔찍한 수용소를 살아보지도, 그 모습을 보지도 못한 나에게 소설의 장면들은 문자만으로는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문자 자체를 읽고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그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지는 않았다. 관련된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꼭 한번 보고 싶다고 느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겪은 훈련소의 모습들이 많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겪은 훈련소의 삶과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가 겪은 수용소의 삶에서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육체적인 고통에서 공통점을 찾지는 않았다. 기초 병사 훈련이 힘들긴 했지만 감히 어떻게 인권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가혹한 작업에 비교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수용소에서 생활하는 죄수들의 모습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밥, 일과 후의 자유 시간과 같은 소소한 것에서 즐거움을 찾고 행복함을 느낀다. 철조망만 넘으면 당연한 것들이 그들에겐 모든 것이다. 그 보잘것없는 것들에 목숨을 건다. 또 그런 것들에 행복함을 느낀다. 빵 조각 하나, 건더기는 찾아볼 수 없는 양배추 국에 그들은 희비가 교차한다. 그런 모습에서 그 어떠한 환경에도 적응하는 사람의 강인함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희망이라곤 찾을 수 없는 곳에서도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위대함을 느꼈다.
위의 얘기에 훈련소 얘기도 덧붙여 보겠다. 훈련소에서 모든 훈련병이 인편, 샤워, 손편지, 책 읽기, PX 가기, 낮잠(오침) 등에 강하게 집착하고 그것을 갈망한다. 집착하고 갈망한다고 하기도 좀 그렇다. 사회에 있을 때는 마음만 먹으면 누릴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권리가 아닌가. 하지만 훈련소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곳만의 규칙을 따라야만 한다. 그때부터 당연한 것들은 분대장, 소대장과 같은 권위자들의 무기가 된다. 권위자들은 보잘것없는 그것들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며 훈련병들을 조종하고 농락한다. 훈련병들은 또 그것에 나뭇가지처럼 휘둘린다. 소수가 다수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불쾌하고 부당하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당한 듯한 기분에 불쾌하다가도 힘들게 얻은, 그 티끌 같은 자유와 권리에 우리는 세상을 다 가지기도 하고 반대로 세상을 다 잃기도 한다.
이 책은 정말 짧다. 고작 하루의 이야기이다.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가 수용소에서 살았던 삼천육백오십사일 중에 하루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0.03 퍼센트 정도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하루를 통해 삼천육백오십사일을 정확하게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소련, 공산주의까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0.03 퍼센트를 통해 100 퍼센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절대적 평등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등 속에서도 희미한 서열, 계급이 존재하고 그 나눠진 좁은 틈 속에서도 줄 세우기가 만연하다. 계급, 권위주의는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그런 것을 다 깨뜨리는 결과적인 평등은 더 큰 불평등과 혼란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소련의 붕괴가 그것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러한 과거를 직시하고 배워야 할 것이다. 과거를 통해 현명하게 현재를 살고 미래를 그려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