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어른의 계절 – 내게서 멀어져 간 그녀의 뒷모습
- mini prolog -
어른이 된다는 건 이해보다 체념을 먼저 배우는 일인지 모른다.
그녀의 뒷모습은 계절처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멀어졌다.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금요일을 기다리는 이번 주는 유난히도 길기만 했다.
하루하루가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매번 반복되는 금요일이지만, 이번엔 무언가 달랐다.
기다림이 아니라, 초조함이었다.
이번만큼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서서히 잠식했다.
그리고 그 불안이, 시간이 흐를수록 나를 더 깊숙이 조여 왔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이 모든 것들이, 이번만큼은 조금이라도 달라지길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이 커질수록 시간은 오히려 더 느리게 흘렀다.
아침의 공기, 점심의 소음, 저녁의 빛깔까지.
온종일 쌓인 시간이 가슴께를 조금씩 눌러왔다.
그리고 어느새, 또다시 금요일의 밤이 찾아왔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서점 문 앞에 섰다.
한 주 내내 나를 억눌러 온 초조함으로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오늘은 이상하게 더 빨리 이 문을 열고 싶었다.
열면 또다시 같은 장면으로 빠져들 걸 알면서도, 그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복이 나를 안심시켰다.
결국, 손이 먼저 문고리를 감싸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밖과 안의 공기가 한 번에 뒤섞였다.
그 온도 차는, 마치 현실과 기억이 뒤엉켜 방향을 잃은 듯했다.
바람이 스쳤고, 먼지와 잉크 냄새가 섞인 공기가 밀려왔다.
그 냄새가 갑자기 몰려들어와 나를 삼키고,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조용히 뒤집혀 있었다.
책장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고, 빛은 느리게 흔들렸다.
현실의 냄새는 빠르게 옅어지고, 오래된 기억의 냄새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그 틈 사이로, 그녀가 있었다.
창가, 익숙한 자리.
처음 겪는 순간인데도 낯설지 않았다.
이미 수없이 반복된 익숙함처럼, 나는 이상할 만큼 무덤덤했다.
그녀를 서점 안에서 마주한 건 처음인데, 내 안의 감정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만남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하지만 어딘가 달랐다.
그녀의 머리는 단정히 묶여 있었고, 표정에는 예전에 보았던 온기 대신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조용한 고요가 내려앉아 있는 듯했다.
“오랜만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나는 대답하지 못한 채, 오래전 잊은 감정을 더듬듯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의 얼굴은 분명 같은데, 시간이 그 위를 한 겹 더 덮어버린 듯했다.
“이제는, 그때처럼 웃을 수 없게 됐나 봐.”
그녀가 조용히 웃었다.
예전의 웃음과 닮아 있었지만, 내게는 이상하게 멀게 보였다.
마치 이해가 아니라, 오래된 체념 쪽으로 기울어 있는 미소처럼.
나는 입을 열었다.
“그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대답 대신 창밖을 바라봤다.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너머로, 비슷한 저녁빛이 흘렀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말해도 달라질 게 없었으니까.”
그 한마디가 내 가슴을 조용히 베어냈다.
그녀의 말투에는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그저 오래된 기억의 먼지를 털어내듯 담담했다.
“우린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아.
나는 너를 지키려고 했고, 넌… 그냥 나를 잊지 않으려고 한 거고.”
그녀의 말은 느리게 흘렀다.
마치 오래전 자신에게 건네는 위로 같은 게 섞여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한 걸음 다가서려 했지만, 발밑의 그림자가 얕게 갈라졌다.
그녀의 실루엣이 빛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의자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뒷모습은 익숙했지만, 그날 이후 내가 단 한 번도 따라잡지 못했던 그 거리 그대로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 가지 마요.”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마치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때… 말하지 못한 게 있어.”
그 말은 공기 속에서 파문처럼 퍼졌다.
그러나 그다음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뒷모습이 문턱을 넘자, 서점의 불빛이 순간적으로 깜빡였다.
그리고, 모든 게 멈췄다.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머릿속은 그 문장 하나로 가득 찼다.
‘그때 말하지 못한 게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때,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은 늘 당신이 보고 싶은 방식으로 재생되죠.”
에일이었다.
그는 어느새 내 옆에 서 있었다.
그의 음색 어딘가에, 방금 전까지 듣고 있던 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겹쳐 들렸다.
나는 그를 바라보지도 못한 채 대답했다.
“그녀가 말하려던 게 뭔지 알아야 해요.”
에일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을 겁니다. 그녀는 이미 당신의 기억 안에서만 존재하니까.”
그의 목소리는 현실의 온도를 닮아 있었다.
나는 문 쪽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녀의 그림자가 사라진 자리에 희미한 빛이 번지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사라지는 기억의 마지막 숨 같았다.
나는 다시금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뒷모습이 어둠 속에서 반복되었다.
멀어지는 그 걸음 하나하나가, 내 안의 진실을 조금씩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때 말하지 못한 게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다시 떠올랐다.
나는 그 문장을 수없이 되뇌었지만,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서점의 불빛이 서서히 꺼졌다.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기억은 진실이 아니야. 단지, 내가 믿고 싶은 이야기일 뿐이야.”
그리고 다시, 정적.
나는 나도 모르게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온기는 아주 천천히 식어 가고 있었다.
문 밖으로 스며드는 공기는, 어른의 계절답게 조용하고도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