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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걷는 시간, 그 흔적을 찾는 공간

06. 오랜만의 편지 – 나를 다시 그녀에게로 데려갔다.

by 이서

- mini prolog -

편지는 언제나 시간을 거슬러 도착한다.

그 문장들은 잊었다고 믿었던 마음을 조용히 다시 열어젖힌다.


나는 이제 시간을 따라가고 있는 게 아니라, 흩어진 장면들을 내 마음이 견딜 수 있는 순서대로 다시 꺼내 보고 있었다.

그런 내게 금요일은, 언제나 가장 먼저 열리는 문이었다.

매주 반복되는 금요일마다 나는 계속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현실의 하루가 끝날 때마다, 내 의식은 어김없이 그녀와의 시간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미련’이라 부르겠지만, 내겐 그보다 훨씬 오래된 간절함이었다.

그건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린 반복이었고, 끝난 사랑을 되살리고 싶다는 마음으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금요일이 올 때마다, 몸이 먼저 서점 쪽으로 기울었다.

이미 깨져버린 우리의 관계를,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처럼 되뇌었다.

그리고 나는 계속 상상했다.

이 집착의 반복이 언젠가, 그녀와 나의 관계를 바꿔놓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한 주 내내 내 기억 속 그녀의 빈자리를 메우려 애썼다.

그녀가 하지 않았던 말을 상상하고, 없었던 장면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조각조각 쌓인 환상이 이 금요일에 이르러 하나의 형태를 갖췄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지나 몸속 깊이 스며들었다.

서점의 낡은 문이 파열음을 내며 열렸다.

그 순간, 현실의 냄새가 희미해지고, 오래된 기억의 냄새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에일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가 늘 앉아 있던 창가 테이블 위에는 하얀 봉투 하나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아이보리빛 종이, 모서리가 살짝 눌리고, 가장자리는 빛에 조금 바랬다.

낯설지 않은 글씨에 이끌려 나는 급하게 봉투를 들어 올렸다.

설레는 손끝에 닿은 종이는 왠지 따뜻했다.

내가 항상 기억하는 그녀의 향기가 미세하게 스며 있었다.


‘누가, 언제 두고 간 것일까? 에일? 아니면… 그녀?’


솔직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이 편지를 읽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봉투를 열고, 종이를 꺼내 펼쳤다.

오래전 그날 그녀에게서 오랜만에 받았던 그 편지였다.


“네 편지를 받았을 때, 많이 놀랐어.

사실 나는 한동안 일본에서 일하다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거든.

바쁘게 살다 보니 이제야 답장을 하게 됐네. 누나가 너무 무심했지?”


너무나 익숙한 문장인데도, 여전히 첫 줄을 볼 때마다 공기가 달라졌다.

그날의 감정이 아니라, 그 감정을 기억하고 있는 나 자신이 다시 살아났다.


“그때도, 지금도, 난 널 잊지 않았어.

네가 먼저 이렇게 챙겨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더 오랜 시간 너를 그리워만 했을 거야.”


나는 이 편지를 셀 수 없이 읽었고, 그럴 때마다 똑같은 곳에서 멈춰 있었다.


“다만 변한 게 있다면, 나는 이제 완전히 어른이 되었고, 너도 네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겠지.”


그때는 몰랐던 그 문장의 의미가 이제는 너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때의 나는 그냥 지나쳤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내 눈에는 그녀의 글씨 끝 어딘가가, 이미 끝으로 살짝 기울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네가 이렇게 연락해 줘서 기뻐.

언제 한번 보자. 솔직히, 누나도 네가 얼마나 변했을지 많이 궁금해.”


그녀의 편지는 언제나 나를 기쁘게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한 주 내내 그녀를 그리워했고, 수없이 상상했지만 결국 모든 건 제자리였다.

되돌린 기억 속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나를 지나쳤고, 나는 여전히 같은 장면 앞에 멈춰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단순한 사실이, 그 어떤 상상보다 더 잔인했다.

나는 편지를 접지도 못한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서점의 공기가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깥의 비 소리가 멎고, 대신 정적이 흘렀다.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한 주 내내 기억의 틈을 이어 붙이고, 존재하지 않았던 감정들로 오늘을 만들어냈죠.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는 못했어요.”


에일이었다.

그는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게 내 옆에 서 있었다.


“그녀가 보냈어요. 분명히요.

향기도, 글씨도, 그 사람이 맞아요.”


나는 봉투를 쥔 채 말했다.

에일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중요한 건, 편지 자체가 아니라 당신이 매번 이 편지까지 걸어오는 길이죠.”


그의 말은 이해보다 먼저, 불안으로 스며들었다.

오래된 상처가 다시 숨을 쉬는 느낌이었다.


“오늘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요. 그저 같은 자리를 한 바퀴 더 돈 것뿐입니다.”


나는 고개를 떨궜다.

그 말은 잔인하게도 사실이었다.

이 편지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내가 매주 스스로 되살려내는 하나의 환영이었는지도 몰랐다.

에일은 내 옆을 지나며 덧붙였다.


“그 마지막 문장은, 약속이 아니에요.

당신이 계속 이 자리에 머물 핑계가 되어버린 문장일 뿐이죠.”


나는 편지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마지막 문장 위에 묻은 잉크가 미세하게 번지고 있었다.

그녀의 필체로 새 문장이 피어났다.

잉크가 번지는 순간, 서점 어딘가에서 종이가 아주 낮게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마치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문장이, 억지로 끌려 나오는 소리처럼.


“오늘도 그리웠어.”


숨이 막혔다.

잉크는 아직 마르지 않았고, 그 냄새는 방금 쓴 편지처럼 선명했다.

나는 편지를 조심스레 접었다.

미세한 그녀의 향기가 손끝에 오래 남았다.

문을 나서며, 종소리가 낮게 울렸다.

문을 나설 때, 빗소리는 처음 들어왔을 때와 똑같이 들렸다.

그런데도 손끝은, 벌써 다음 금요일의 문고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건 끝이 아니었다.

다음 금요일에도, 나는 다시 그 문 앞에 서 있을 것이다.

내가 그녀와의 관계에 집착하는 한, 나는 그 시간 속으로 계속해서 흘러 들어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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