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걷는 시간, 그 흔적을 찾는 공간

14. 잉크가 완성한 하나의 진실

by 이서

- mini prolog -

사라지지 않던 잉크가, 드디어 한 줄을 만들기 시작한다.

감정은 참으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형태를 찾는다.


며칠이 지났지만 나는 손바닥의 잉크를 지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라지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이제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그 점 하나가 어디로 향하려 하는지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손바닥은 유난히 뜨거웠다.

잉크가 마치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골목으로 향했다.

걸음은 가벼웠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오래 눌려 있던 무언가가 오늘은 제 형태를 찾겠다고 내 안쪽을 천천히 두드리는 듯했다.

서점이 있던 자리 앞에 서자 문은 거의 투명해져 있었다.

겉모습만 남은 얇은 막처럼, 이제는 사라지기 직전의 기척만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나는 문 쪽으로 손바닥을 들었다.

잉크가 아주 조용히 떨리고 있었다.

반응하고 있었다.

문은 나를 들여보냈다.

저항은 없었다.

마치 마지막으로 한 번 내게 할 말을 전하고 싶어 하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안쪽은 거의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테이블 위, 그 책 한 권만은 정확히 처음의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책 위에 올렸다.

그 순간이었다.

잉크가 한 번 크게 떨렸다.

그리고 아주 또렷한 곡선을 그리며 모양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떼지 못했다.

그 움직임을 방해할까 두려웠고 동시에 그 문장이 무엇이 될지 알고 싶은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 쏟아져 올라왔다.

잉크는 마침내 한 줄을 이루었다.

짧고, 간결하고, 내가 너무도 잘 아는 글씨체였다.


‘넌 이제 괜찮을 거야.’


나는 숨을 들이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가슴이 한순간 꽉 조여들었다가 이내 크게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문장은 내가 쓰려던 말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기다리던 말도 아니었다.

그녀가 남기고 싶었던 말이었다.

마지막까지, 나를 향해.

내가 감당하지 못할까 봐 차마 입 밖에 내지 않았던, 그녀의 진심이었다.

그때 공기 어딘가에서 아주 익숙한 숨의 결이 스쳤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에일의 목소리가 천천히 번졌다.


“그 문장은… 당신에게 전달된 누군가의 마지막 진심입니다.”


목소리는 흐릿했지만 말의 온기는 또렷했다.

마치 그녀의 말투가 에일의 말투를 감싸 안은 것처럼 들렸다.

나는 손바닥을 더 꼭 쥐었다.

잉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흩어지지도 않았다.

그저 내 손 안에서, 조용히 숨을 쉬는 감정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제는…”


에일의 목소리가 아주 천천히 이어졌다.


“당신이 스스로 돌아서는 날이겠네요.”


나는 눈을 감았다.

몇 년 동안 뒤척이며 붙잡아왔던 감정들이 마침내 하나의 자리에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잉크가 문장이 되기까지 걸렸던 그 오랜 시간처럼 나 역시 오늘에서야 하나의 감정으로 완성되는 것 같았다.

문은 더 이상 나를 잡아두지 않았다.

그녀도, 이 서점도, 어떤 기억도 이제는 나를 붙들 이유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가벼운 숨을 내쉬었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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