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사라진 잉크와 남겨진 흔적
- mini prolog -
기억이 사라지는 건 끝이 아니다.
사라지고 난 자리에 무엇이 남는지가, 끝을 결정한다.
서점이 있던 골목으로 가는 길은 이상할 만큼 가벼웠다.
지난주까지는 발걸음이 무거웠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조각들이 발목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골목을 돌자마자 나는 멈춰 섰다.
거기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간판도, 희미하게 빛나던 유리창도, 문이 사라진 자리의 어색한 평면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서점이 있던 곳은 마치 오래전부터 비어 있었던 공간처럼 조용하고 건조한 공기를 품고 있었다.
그 자리의 질감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여기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내 기억의 주장만이 오히려 허망한 상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벽을 향해 천천히 손을 들었다.
손바닥에 스며 있던 잉크의 감각을 떠올렸다.
그러나 오늘 그 감각은 희미했다.
흔적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더 이상 내 손끝에 매달려 있을 이유가 없어져서였다.
나는 벽을 한 번 가볍게 눌러보았다.
당연하다는 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문턱의 저항도, 안쪽의 기척도, 공기를 가르는 미세한 떨림도 없었다.
서점은 정말로 끝났다.
그 공간은 이제 나의 기억에서만 존재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제는 그걸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벽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돌아섰다.
오늘만큼은 이 골목에서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
에필로그 - 몇 주 후, 금요일
회사에서 나와 길을 걷던 중 나는 문득 멈춰 섰다.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전 같았다면 이 시간쯤이면 나는 그녀의 흔적을 좇듯 골목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 길이 내가 살아 있는 방식이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나는 어디로도 끌리지 않았다.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아무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묘하게 따뜻한 감각이 손 안쪽에 남아 있었다.
어떤 문장도 적혀 있지 않은 빈 공간인데 압도적인 고요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다를 걷던 날의 표정, 전철 안에서 눈을 피하던 순간, 겨울 길에서 했던 마지막 말들.
그 모든 장면이 여전히 선명했지만 더는 아프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그녀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기억들 속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있었음을 이해했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떠나간 사람의 진심은 지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다른 형태의 온기로 남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발걸음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그 방향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나는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그 길을 선택했다.
기억을 걷는 시간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그 흔적뿐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흔적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앞으로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