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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그 가슴시리도록 아름다운

Ⅳ. 가을.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by 이서

그해 여름이 지나가자, 공기는 조금씩 차분해졌다.

학교 운동장 가장자리에 늘어선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들었고, 바람이 불면 마른 이파리들이 바닥을 굴렀다.

나는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여전히 그녀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그녀에게서 온 봉투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녀의 글씨를 마주할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처음엔 거의 매일같이 편지가 왔다. 날씨 이야기, 학교에서의 사소한 일상, 별 의미 없는 농담까지.


“잘 지내고 있지? 누나가 많이 보고 싶어.”


그 짧은 한 줄이 내 마음을 오래 붙잡았다.

가을빛이 창가로 스며드는 순간마다, 그 문장은 어김없이 내 가슴 한켠을 저리게 했다.

어느새 시간은 흐르고, 중3 겨울이 지나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녀의 편지는 조금씩 줄어들어 갔다.

일주일에 한 번 오던 편지가 이주일에 한 번이 되고, 봉투의 두께도 점점 얇아졌다.

그녀의 편지와 상관없이 나는 편지를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답장을 기다리는 날들은 차곡차곡 쌓여 끝내 긴 기다림이 되고 있었다.


“미안해. 요즘 너무 바빠서… 고등학생이 되니 학교 일도 그렇고… 이것저것 누나가 챙겨야 할 게 많아져서 그런가 봐.”


가을의 차가운 빗방울이 창문에 흘러내리던 날, 그녀의 편지를 읽으며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짧은 문장 속에서 작은 의미라도 찾고 싶었던 탓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먼저 고등학생이 되어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고 있었다.

나 또한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 여름날에 머물러 있었다.

고2가 되었을 때, 편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줄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내용은 더 짧았다.


“잘 지내고 있어? 건강해.”


몇 줄 되지 않는 글자를 읽고 있으면, 오래 전 내게 밤새 편지를 쓴다던 그녀 모습이 때때로 그리웠다.

하지만 그 그리운 기억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우편함을 열어보는 손길은 여전히 설렜지만, 편지가 없는 날이 점점 더 익숙해졌다.

내가 고3이 되었을 무렵, 그녀가 왜 대학 진학을 포기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이미 사회인이 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을 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조금 낯설었다.


“누나, 요즘 너무 바쁜 거 아니에요?”

“음… 그렇지. 회사 일도 많고, 정신없네.”

“그래도… 우리 가끔 연락해요.”

“그럼, 당연하지.”


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말은 지켜지지 못할 약속이라는 것을.

‘당연하지’라는 말이 오히려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가을의 공기는 차갑게 스며들었고, 나는 여전히 그녀를 떠올리며 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보다 점점 어른이 되어갔고, 이미 내 세계 바깥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오래전 그 여름의 바다와 밤하늘 속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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