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미자, 2013년
“문경 점촌 H농장에 갈 건데 자네도 같이 가든가. 안 가도 괜찮아,”
이는 잠에서 깨어나자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며 식탁에 앉아 콩나물 다듬는 나에게 몇 마디 툭 내던진다. 며칠 전부터 내린 눈은 산천을 푹 파묻었다. 밤사이 10센티는 더 내린 것 같았다.
문경엘 가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평소 같았으면 그 “어머! 좋아요, 설경 속으로, 멋진 드라이브가 되겠네요.” 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뜩 대답을 못했다. 설 쇠느라고 피곤한데다가 사소한 말다툼의 화가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환기시킨 눈바람이 싱그러워서일까? 우울하지만은 않은 아침이다. 식사 준비하는 등에다 대고, 밥 안주고 뭐하느냐고 또 한마디 툭, 내던진다. 내던지는 말을 받아먹고 산지도 십 수 년이라 예사롭다.
오늘 아침 김치반찬 기본이고 제철 아욱을 살짝 데쳐 냉동실에 넣었다가 끓인 아욱국과 굴비 한 마리와 콩나물 무침이다. 나는 굴비 살은 발라 접시에 놓고 가시머리를 쪽쪽, 빨고 있노라니 ‘고양이도 굴비머리 물어다 놓고 하품한다.’ 라는 말이 떠올랐다. 참으로 굴비머리는 먹을 것이 없어서 어두일미가 무색하다.
커피를 마시면서 문경세재의 추억을 더듬었다. 이화령 고개를 넘어 점촌H농장에 갔다 돌아오는 중 눈발이 휘날렸다. 순식간에 발목이 파묻힐 정도로 쌓였다. 울리는 핸드폰에 대고, 이는 괜찮다고 갈 수 있다고 한다. H농장 주인인 모양이었다. 나는 곧 어두워질 건데 눈 쌓인 고갯길을 어떻게 넘겠느냐며 되돌아가자고 했다. 이는 집에 가서 내일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액셀을 밟아 댔다. 자동차 바퀴가 눈에 빠지면서 뿌득뿌득 굴러갔다. 다행이 이화령 고개 초입에서 눈은 그쳤으나 중턱도 못가서 승용차가 오르기를 버거워하더니 서고 말았다. 이는 나보고 내려서 밀라고 했다. 나는 싫다고, 그이는 밀라고 실랑이하는 동안 캄캄해졌다. 완전 쇠고집이라 내려서 밀수밖에 없었다. 퉁명스럽게 팍 밀었는데 혼자 팽 올라가 버렸다. 그래, 이렇게 버려질 수도 있겠구나, 그때 수화기 속에서 흘러나온 상냥한 여자의 음성, 그녀는 누구였을까? 이와 어떤 관계였을까? 혹시?”
의심의 꼬리는 굵었지만 길수가 없었다. 거친 숨소리, 울리는 발자국 소리는 이미 나를 떠나 떠도는 괴음 소리로 들려왔다. 흰 눈 위에 시커먼 바위, 나무 그림자가 도깨비도 되었다 유령도 되었다 두리번거릴수록 두려움은 더해서 저들에게 먹혀버릴 것만 같았다.
“어디 있는 거예요?” 이것은 비명이었다.
“ 빨리 올라와!”
“못가, 안 갈 거야” 소리 지르면서 가고 있었다. 고함 소리에 잠자든 산천의 가족들이 다 깨었는지 기척이 훈훈하게 흘렀다. ‘그래, 무섭지 않아! 이들은 다 내편이야!’ 땀을 쪽 흘리며 눈 속을 허겁지겁 걸어 오르니 조금 평평한 곳에 이가 서 있었다. 반갑고도 얄미웠다.
“그렇게 달아나 버리면 눈 쌓인 이 밤에 고갯길을 혼자 걸어서 넘으란 말예요?” 이는 오르다가 쉬면 더 힘들다며 숨 돌리기도 전에 또 밀라고 했다. 밀기를 반복하고 버림을 몇 번이나 받고 드디어 이화령고개에 이르렀다.
이제부턴 목숨을 걸어야 했다. 눈 쌓인 외줄 같은 길을 어떻게 중심잡고 갈 것인가, 조금만 삐끗하면 천야만야 아득한 골짜기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이다. 이 현실이 꿈이었으면 좋으련만,
“걱정 마! 잘 갈 수 있어,” 말은 그렇게 해도 몹시 불안한 모양이다.
“힘내세요. 당신이 떠받드는 조상님이 도와 줄 거고, 내가 의지하고 기대는 듬직한 산이 도와 줄 거예요” 한 바퀴 두 바퀴 차체로 눈을 녹이며 굴러가다가 조금만 삐끗 출렁해도 심장이 떨어졌다 붙었다. 그야말로 살얼음판에 목숨 내놓고 가는 거였다. ‘스르르 출렁,’ 놀라지도 못하고, 눈을 감고 숨을 멈췄다. 온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걸고, 무모하게 죽는구나. 자식들 얼굴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나를 아는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잊어지는구나. 앞바퀴가 반쯤 빠지면서 참나무에 걸린 것이다. 이는 계속 후진했다. 가까스로 차가 바로섰다. “참나무야! 너무 고마워, 우리를 살렸구나! 와아! 당신 너무 침착하게 운전 잘하네요,” 완전 천천히 바퀴로 쿡쿡 확인하며 스프링 같은 길을 밤새 기어서 아침에 마을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민박하느라고 차들이 여기저기 주차되어 있었다. 밤새 악몽 꾼 것 같았다
그 점촌을 또 가잔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생겨서 문제없지만 문경 소리만 들어도 그 아찔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이는 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이 문단속을 했다. 나의 심한 건망증 때문에 갈등하다가 언제부턴가 포기했는지 외출할 때면 스스로 학인하고 문단속까지 한다. 그렇다고 크게 미안해하지도 않다. 단점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어느 정도 치루고 산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제안을 내가 거절하지 못하는 줄을 이는 안다.
‘그래, 가자!’ 길동무하면서 화해도 할 겸 설경 속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