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미자, 하나씩 내려놓으며 산다 산문집중 2013년
이 겨울 끝자락 산행, 제왕산을 타기로 했다. 농협주부산악회는 매월 둘째 화요일 오전 6시 30분에 관광버스 타고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금수강산을 찾아간다.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왕산면 사이에 왕처럼 앉아있는 제왕산. 높이 841m. 태백산 줄기인 대관령 휴계소에서 제왕산성(봉우리)넘어 대관령 박물관까지 3시간 정도 소요된다. 고려 말경, 공민왕 뒤를 이은 어린 우왕이 이성계 세력에 쫓겨 이곳에 성을 쌓고 지낸 유배지다. 지금도 축대돌, 기왓장 등 그 잔해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우리 일행은 대관령 남쪽 휴게소에서 내렸다. 제왕산은 그 이름만큼이나 위엄이 있어 보였다. 등산화에 아이젠을 채웠다. 영동고속도로준공 기념비를 끼고 돌아 오르면 '인풍비'가 있고, 몇 발짝 더 오르면 우측은 '능경봉'이라는 화살표 푯말이 있다. 좌측은 묻지 않아도 제왕산성 가는 길이다. 그 능선을 탔다. 수북한 눈 위에 먼저 간 발자국을 딛고 걸었다. 조금만 어긋나면 허벅지까지 눈 수렁에 빠져서 동료들이 잡아줘야 겨우 나올 수 있다.
뽀득 뽀득 눈 밟는 소리. 설산의 싱그러운 숨결이 상쾌하다. 한 겨울 추위를 꿋꿋이 견디고 꽃샘추위도 아랑곳 하지 않고 탱글탱글 물오른 참나무 가지에 노란 실눈이 금방 터질 것 같다. 그렇게 봄맞이에 분주한 내리막 참나무 숲을 지나 솔숲 능선 따라 오르면 기암괴석과 고사목 군락이다. 무엇 때문에, 왜, 마저 태워 재가 되지 못하고 새까만 둥치만 쓸쓸이 남아 먼 산만 바라보고 있을까? 숙연함도 잠시. 눈 위에 짙게 드러난 고사목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했다. 호호 하하 어린 시절 어머니가 두는 이불 솜 위에서 뒹구는 것 같았다. 봄 여럼, 가울 겨울 차림새는 달라도 변함없이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산, 그 품에 안기면 세속의 고달픔을 잊고 마냥 즐겁다.
드디어 제왕산성에 도착했다. 대관령에서 산성까지 1시간이 소요되었다. 유구한 역사를 담고 과묵하게 앉아있는 제왕설봉, 그 아래로 제왕의 품위를 닮은 시중인 듯, 백성인 듯 줄선 설봉들, 1만 복은 넘을 듯하다. 곳곳에 빼어난 절경, 달리 표현할 말이 부족하여 그냥 가슴만 벅차오른다. 또한 기막힌 산 끝자락을 두르고 지형과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남대천, 강릉시가자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 속에 율곡이 태어난 생가가 있다고 한다. 동양 문화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유학자이며 글씨와 그림에 능한 서화가인 이이율곡 선생이 그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뜰 안에 죽헌 나무(대나무과)가 있어서 생가를 오죽헌이라고 부르고, 조선 초기 목조 건축으로 보물 165호 문화유산으로 보존,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문화유산이 많은 강릉시가자기 남대천을 끼고 고고한 세월을 살고 있다.
전망을 내려다보며 서로의 견해를 공감한 뒤 눈 위에 엉거주춤 앉아서 위스키와 눈을 칵테일 해 마셨다. 그 기막힌 맛은 고사목, 하늘산, 기암괴벽, 눈이 배합되어 짜낸, 제왕이 마시는 성주 맛이다. 그리고 단체사진과 마을별 사진들을 촬영하고 사산 길로 접어들었다.
산에 오르면 언제나 느끼는 기분이지만 오늘 내 몸은 뭉친 지방 1kg을 떼어 낸 듯이 가볍다. 조금 내려오다 보면 헬기장이 보이고 이동통신 중계탑도 보인다. 산 사이로 토막 난 영동고속도로도 한토막 보인다. 몇 발짝 더 내려가 금경사진 곳에 이르렀다. 계단이 있음직한데 눈이 쌓여서 보이지 않고 발자국 언 빙판이 어어졌다. 갑자기 앞선 사람이 반 누워서 미끄러져 내려가며 환호성을 지른다. 나도 얼떨결에 미끄러졌다. 모두 따라 환호성이 이어졌다. 인솔자가 말렸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속도가 가중되므로 요샛말로 스릴 짱이었다. 그렇게 산 중턱까지 썰매타고 내려왔다. 그 후 조금만 경사져도 걷지 않고 주저앉아 미끄럼을 탔다. 다행이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우리가 닦아놓은 빙판 길을 오를 등산객이 걱정됐다.
일행은 옛길에 다다랐다. 옛 사람들이 그 길을 지나 재를 넘어서 한양에 다녔다고 한다. 여류 문인으로 덕이 높고 산수, 자수, 침공 등 다재다능한 신사임당도 한양에서 어머니를 뵈러 갈 때 이 길을 지나 재를 넘었다고 한다. 지금은 잡초가 우거져 흔적만 남아 전설처럼 전해진다. 옛사람들의 재래시장 같은 삶이 아득하게 상상된다.
우리는 드디어 대관령 박물관에 도착했다. 대관령 휴게소에서 제왕봉을 넘어 대관령 박물관까지는 7.6km이고, 3시간이 소요된단다. 그런데 30분 빨리 도착했다. 눈썰매가 30분을 벌어준 셈이다. 시장한 터에 나눠먹으려고 넉넉히 싸온 도시락을 못 싸온 사람들과 같이 둘러 앉아서 먹는 맛이 기막혔다. 유난히 붉고 고운 노을이 지는 해의 마지막 열정 같았다.
이번 산타기는 추억의 장식장에 눈썰매기록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