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글을 쓰는 일이 한없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사적인 감정의 부스러기들을 끄적이고 있을 때 더욱 그렇다. 혼자만의 일기라면 모를까, 누군가가 읽어주길 바라고 쓰는 글이라면 독자에게 한 줌의 의미라도 전해주어야 할 텐데 의미 없는 글이 될까 봐 자꾸 소심해진다.
살아가는 데 유용한 정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남다른 지식이나 지혜를 전하지도 못하는 글을 누가 읽을까. 유명인의 글이라면 그 사람의 사생활이나 숨겨진 마음이 궁금하여 찾아 읽을 수도 있겠지만, 무명작가의 글은 좀 낯설고 서먹서먹하지 않을까. 시간을 내서 무명작가의 글을 찾아 읽으며 그 작가를 알아가기엔 공이 많이 드는 일이다.
이름 모를 빛들로 가득한
희망이란 빚더미 위에 앉아
무명실로 뭔갈 기워 가는데
그게 무언진 나도 잘 모르겠어
- 가수 이승윤의 <무명성 지구인> 가사 중
최근 <싱어게인> 우승자로 유명해진 가수 이승윤의 노래 중에 '무명성 지구인'이란 곡이 있다. 노래 가사가 유독 와 닿았는데, 특히 이 부분이다. '무명실로 뭔갈 기워 가는데, 그게 무언진 나도 잘 모르겠어.'
문자라는 무명실로 글이라는 것을 기워가고는 있는데, 인생이라는 커다란 시간 앞에서 대체 지금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대체 알 수가 없다. 난 지금 친구에게 선물할 목도리를 짜고 있어, 올겨울에 입을 스웨터를 만들고 있어... 이렇게 확실히 답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작가 자신도 형태를 알 수 없는 글을 독자들에게 읽어달라 내놓는 것이 아무래도 염치없다.
'이 글은 어떤 알 수 없는 것의 단면일 뿐이에요. 그게 뭐냐고요? 글쎄요,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퍼즐 조각 같은 거죠. 죄송한데, 시간이 되신다면 퍼즐 조각 하나라도 읽어주실 수 있나요? 언젠가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날이 있을 거예요. 그때까지는 모호하고 고개를 갸웃하시더라도 조금만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독자 한분 한분 찾아가 읊조리며 이렇게 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모든 것은 글을 설계하고 직조해내는 내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공을 하려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한 목표 설정을 하고, 그에 따라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실행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확실히 아는 것은 성공을 위한 필수 덕목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상하게 난 그걸 못하겠다. 그런 전략과 전술을 짜는 게 당최 안 되는 사람이다(그걸 못해서 나는 무명작가인 건가. '무명작가라 서러워요'라고 제목을 뽑았어야 하나?).
한 번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작가를 뽑는 공개 오디션이 있다면 참가할 의지가 있을까? 물론 작가 오디션이 TV에서 방영될 일은 당분간, 아니 영원히 없을 것이다. 작가 지망생들, 혹은 무명작가들이 나와 주구장창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모습을 대체 누가 보겠는가. 게다가 승패를 가르려면 참가자들이 쓴 글을 다 읽어봐야 하는데, 노래와 달리 글은 직관적으로 느끼고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나는 가수가 아니라 작가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가수 지망생이었다면 TV 공개 오디션에 나가지 않는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며 자책했을 게 분명하다. 물론 모든 가수 지망생들이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야 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내심 나가고 싶으면서 이것저것 핑계를 대며 어물쩡거렸을 것이다.
나는 한동안 '명성=실력'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고로 내가 명성이 없는 것은 아직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실력을 키우려고 노력하다가도 문득 화가 나는 날에는 남들이 나를 못 알아봐 준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2020년 백상예술대상에서 '동백꽃 필 무렵'으로 TV부문 남자 조연상을 받은 오정세 배우의 수상소감이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어떤 작품은 성공하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심하게 망하기도 하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좋은 상까지 받는 작품도 있었는데요... (중략)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가 잘해서 결과가 좋은 것도 아니고, 제가 못해서 망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세상에는 참 열심히 사는 보통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하거나 지치지 마시고, 포기하지 마시고, 여러분들이 무엇을 하든 간에 그 일을 계속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탓이 아닙니다. 그냥 계속하다 보면 평소와 똑같이 했는데 그동안 받지 못했던 위로와 보상이 여러분들에게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중략) 힘든데 세상이 못 알아준다고 생각할 때 속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곧 나만의 '동백'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여러분의 동백꽃이 곧 활짝 피기를 저 배우 오정세도 응원하겠습니다."
노래든, 글이든 그것을 들어주고 읽어주는 이가 없다면 반쪽에 불과하다. 누군가는 혼자만의 작업으로 만족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다. 이왕이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글을 쓰고 싶다.
'사랑받는 글을 쓰기 위한 101가지 방법' 같은 것은 알 도리가 없지만(설사 방법을 안다고 해서 그렇게 쓸 자신도 없지만),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냥 지금처럼 의미 없어 보이는 작업을 꾸역꾸역 계속 해내는 것. 그것밖에 없다. 언젠가 퍼즐 조각이 맞춰지길 바라면서... 한 조각 한 조각의 모양을 관찰하며 보이지 않는 전체를 가늠해 보는 것에 작은 기쁨과 감사를 느끼면서 말이다.
불투명하고 흐릿한 글이라도 어여삐 보아주는 이가 있다면 그와 함께 문장과 문장 사이, 의미 없는 의미를 찾아 떠나볼 용기가 날 것 같다. 그와 함께라면 미로 같은 길에서 헤매게 되더라도, 혹여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잃더라도 다시 의미를 만들어낼 희망이 생길 것 같다. 사적인 감정이 쓰레기처럼 토해지는 글이 아니라 정제된 언어로 그의 심장에 가닿는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
*배우 오정세 수상소감 https://www.youtube.com/watch?v=ERul9QhSArs&t=1s
*이승윤 '무명성 지구인' MV https://www.youtube.com/watch?v=udyWy91VLhI&t=82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