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고 싶은 것들

by 조혜영

세상에는 닮고 싶은 것들이 참 많다.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 온 힘을 다해 겨울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새싹, 강아지의 순한 얼굴, 신선하고 색이 선명한 파프리카, 고양이의 무심한 도도함... 할 수만 있다면 이들 곁에 바짝 붙어서 기운을 쏙쏙 빨아들이고 싶은 마음이다. 오죽하면 시인 이원하는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라고 썼을까.


닮고 싶다는 것은 일종의 질투다. 내 안에 결여된 것을 닮고 싶은 대상에서 발견한 자의 소유욕... 수국의 즙 같은 말투가 어떤 말투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인은 그 말투를 갖기 위해 수국의 즙을 짜서 마시겠단다. 대단한 소유욕이다.


나는 옹졸한 마음 때문에 일을 그르친 어느 날 문득 하늘을 올려보다가 어쩜, 가슴을 활짝 열고 있는 무한한 하늘에 그만 질투가 나고 말았다. 하늘의 넓은 마음을 훔치고 싶었다. 내 심장 옆에 하늘을 이식해 와서 무허가 확장공사라도 하고 싶었다. 무색무취로 무기력하게 사그라들어간다고 느끼던 어느 오후에는 냉장고 속 노랗고 빨간 파프리카가 얄밉도록 미웠다. 파프리카의 색깔을 갖고 싶어서 생 파프리카를 썰어 어그적 어그적 씹어먹었다. 오래오래 파프리카의 선명한 색이 온몸에 스며들도록.


닮고 싶은 것이 자연 뿐은 아니다. 사실 제일 닮고 싶은 것은 사람이다. 내 안에 결여된 것을 오롯이 갖고 있는 사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른 P, 말을 조리 있고 예쁘게 잘하는 K, 섬세한 감성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S,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고 에너지 넘치는 H... 수국처럼 그들을 착즙기에 넣고 갈아 마실 수도 없고, 어떻게 하면 그들의 시선과 말투, 감성과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 방법을 궁리해보곤 한다.

아침부터 피곤하고 힘이 빠지는 어떤 날엔 BTS의 'Dynamite'를 듣고 또 듣는다. 'Dynamite'의 리듬과 텐션을 착즙기로 짜내서 마시고 또 마신다.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그 리듬에 맞춰 어깨가 들썩여지고 엉덩이가 바닥에서 가볍게 떨어진다.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거다.


섬세한 감수성과 문체가 닮고 싶을 때는 시인 이원하의 시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를 한 자 한 자 필사한다. 수국의 즙을 짜 마시는 시인의 시를 씹고 또 씹어먹는다. 그의 말투를 가지고 싶어서... 한참을 그러고 있다 보면 서울에 있는 내가 마치 제주 바닷가를 걷고 있는 시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시인이 된 나의 눈에 세상의 다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시인의 마음으로 내가 느낀 감성을 표현하고 싶어 진다.


용기가 필요할 때는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역전승으로 금메달을 차지한 펜싱선수 박상영의 경기를 떠올린다. 모두가 질 거라 예상하던 상황에서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어."라고 조용하지만 단호히 읊조리던 박 선수의 자기 암시를 따라 해 본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어... 이렇게 몇 번이고 말하고 나면 보란 듯이 역전승을 거머쥔 박 선수처럼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일을 멋지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의지가 생긴다.


드라마를 잘 쓰고 싶은데 생각처럼 되지 않아 속상한 날에는 '나의 아저씨'를 본다. 드라마 속 캐릭터와 공간을 머릿속으로 가져와 나만의 미니어처 세계를 만든다. 16부의 시간이 내 안에서 흘러간다. 등장인물과 사건들도 모두 내 안에 있다. 나는 등장인물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 안에서 작가의 의도는 어느새 내 것이 되고, 나도 좋은 드라마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갖게 된다.


어느 철학자는 인생은 착각 속에서 사는 것이라 말한다. 어차피 삶이 착각이라면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을 닮아가는 착각을 하고 싶다. 이런 착각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확장시키고 성장시키고자 함이다. 어떤 수도자는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야말로 진정한 나라고 말한다. 대상이 곧 참나. 하늘도, 산도, 새싹도, 강아지도, 가수도, 시인도, 운동선수도 또 다른 내 모습이라는 말이다. 우주 만물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니 그들이 모두 '나'인 것이다.


또, 어느 양자물리학자는 평행우주 수많은 지구에 무수히 많은 내가 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평행우주에 살고 있는 나는 가수이기도 하고, 시인이기도 하고, 운동선수이기도 할 것이다. 무한히 존재하는 내가 지금 이 순간 다른 지구에서 용을 쓰며 살아가고 있을 생각을 하니 속을 나눌 친구가 생긴 것 같아 의지가 된다. 나는 평행우주에 살고 있는 또 다른 '나'들을 닮고 싶다.


다시 생각하니, 닮고 싶다는 것은 질투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소유욕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과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물아일체의 상태를 경험하고 싶은 근원적 욕망이 나에게 있었다. 닮고 싶은 대상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만큼 사랑하는 것들이 많아졌다는 말일 테니까. 하루에 하나씩 사랑하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거룩한 의식을 치르려면 부지런해져야겠다. 닮고 싶은 것들이 많아 오늘도 바쁘다. 이런 바쁨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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