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가 취미가 아니라 수련이 될 때

by 조혜영

요가를 처음 시작한 지는 15년 정도 되었고 본격적으로 몰입한 것은 6,7년 전부터다. 길지 않은 요가 인생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비교한다면 전반부는 취미, 후반부는 나름의 수련인 셈이다.


수련이라고 칭하긴 했지만 그리 거창하진 않다. 그래도 취미로 요가를 할 때와는 많은 변화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요가원을 가는 횟수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전에는 일주일에 두어 번, 마음 내키는 날에 가곤 했다면 6,7년 전부터는 거의 매일 갔다. 마냥 귀찮고 방에서 뒹굴대고 싶어도 '그냥' 갔다. 약속도 가능하면 요가 시간을 피해 잡았다.


무엇보다 요가를 수련의 수단으로 삼고 나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육체적 통증을 대하는 마음의 태도다. 요가 동작을 유지하는 동안 육체적 통증은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데, 취미로 요가를 할 때는 그 고통을 피하고만 싶었다. 내 돈 내고 요가를 하면서 고통을 참아야 한다는 것이 뭔가 억울하다고 할까. 말 그대로 사서 고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쉽게 할 수 있는 동작, 시원하게 스트레칭되는 동작 위주로 요가를 했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효과가 없진 않다. 몸과 마음의 개운함, 힐링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 정도로도 충분했는데,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수련'이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단어를 써가며 요가를 하고 있는 걸까? 그 시작점으로 돌아가 자문하면 절반은 의지였고, 절반은 처벌이었다. 요가를 수련으로 대한다는 것은, 내 기준에서는 견디기 싫은 고통을 기꺼이 견뎌보겠다는 다짐인데 말 그대로 사서 고생을 해보겠다는 선택이었다.


잡히지 않는 욕망을 좇다가 상처투성이가 된 20대,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를 겪으며 어디 있는지도 모를 자아를 찾아보겠다고 허송세월 한 30대의 시간을 후회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이룬 것 없고 내세울 것 없는 자신에게 벌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고통을 피한 것이 단순히 요가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삶의 매 고비에서 내 선택은 늘 고통을 피하는 쪽이었다. 일을 할 때도, 꿈을 위해 도전이 필요한 순간에도 조금이라도 힘들 것 같으면 쉽게 포기하고 도망쳤다. 내가 만든 안전지대 안에만 머물며 그 상태를 마음의 평화, 평정심으로 착각했다. 고통을 피하고자 만든 생활 반경은 소소했지만 그럴수록 뒤틀린 욕망은 괴물처럼 비대해졌고,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너덜너덜해져 갔다. 그동안 오로지 고통을 피하기 위해 살아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온갖 통증이 몸과 마음에 들이닥쳤다. 인생은 어떻게든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는 걸 그때 배웠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더 밀려오기 전에, 어떻게든 피해왔던 고통부터 처리해야 했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요가 수련을 선택했다. 밀어두었던 내 몫의 고통을 요가를 하면서 다 받기로...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바득바득 젖 먹던 힘까지 내야 했다. 스스로 육체적 고통을 주고, 그 고통을 견뎌낼 때마다 어리석었던 과거의 시간들이 면죄부를 받고 풀려나는 기분이었다. 매일매일 요가라는 감옥에 나를 가둬놓고 벌을 주면서, 또 벌을 받으면서 과거를 청산하는 의식을 내 나름대로 치르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고통의 역치를 넘기고 나면 지금과는 다른 세계가 보이지 않을까 하는 가느다란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

내가 육체적으로 힘들다고 느낀 동작들은 두 팔로 몸을 들어 올리는 류의 동작들과 고난도의 동작을 연속적인 시퀀스로 해내야 하는 아쉬탕가 요가였다. 이 동작들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코어 힘과 인내심이다. 코어 힘이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길러진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필요한 것은 인내심인데, 이 인내심이 바로 고통을 견디는 힘이다. 그렇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인내심 레벨이 바닥, 그것도 아주 밑바닥이었다.


일을 할 때도 가능하면 쉽고 빠르게 성취하고 싶었다. 사람이나 상황들이 모두 내가 생각한 대로 척척 돌아가길 바랬다. 조금이라도 견디고 인내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을 '고통'으로 규정해 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견딤과 기다림, 인내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세상에 있을까 싶은데... 생명 탄생의 순간부터 과일과 곡식이 익어가는 시간까지 말이다. 삶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음을 고백한다. 인생이 생선회도 아닌데, 날로 먹으려고 했구나...


다행인 것은 고통은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이다. "하나, 둘, 셋... 아홉....... 열." 요가 선생님이 붙이는 숫자가 아무리 길어도, 특히나 아홉 다음에 열을 세기까지 그 텀이 얄밉도록 길게 느껴지더라도 1시간의 요가 수련은 반드시 끝이 있다. 결국은 끝나게 되어 있다. 진정한 평화와 평정심은 인내를 발휘한 후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순간에 비로소 찾아옴을 마지막 사바아사나를 하며 배운다.


그러니 내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데 있다. 깊이 호흡하다 보면 통증 너머 고요한 공간이 순간순간 찾아오기도 한다. 고통을 즐기는 경지까진 이르지 못했지만 고통이 때로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조금 알겠다.


이제 더 이상 나를 처벌하기 위해 요가를 하진 않는다. 그동안 미뤄놓았던 고통은 다 받아낸 걸까? 다가올 고통들은 아직 남아 있겠지만 이젠 좀 더 행복하게 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제 요가를 하는데, 초보자로 보이는 한 분이 농담처럼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이 동작 119 불러 놓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모두가 공감하여 웃고 있는데, 선생님의 농담인 듯 농담 아닌 대답이 이어졌다.


"제가 꽤 오래 요가를 가르쳤는데요. 여태까지 한 번도 119를 부른 적은 없었어요."


그래, 119를 부를 상황이 아니라면 그건 견딜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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