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생선회를 싫어했다. 차갑게 혓바닥에 와 닿는 날 것의 촉감이 별로였다. 물컹거리는 식감도 징그럽게 느껴졌다. 초등학교 때였던가. 처음으로 초고추장을 찍은 생선회 한 점을 입에 넣었다가 몇 번 씹지도 않은 채 바로 뱉어냈던 기억이 있다. 굽거나 튀기거나 조리면 더 맛있을 생선을, 왜 어른들은 날로 먹는 것인지 그때의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세월이 흘러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생선회의 참맛을 알게 되었는데, 사실 그보다 먼저 소주의 참맛에 눈을 떴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주 안주에 생선회만 한 것이 없구나 하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막내 작가로 고된 일상을 보내던 시절, 하루의 마감은 언제나 술로 끝나곤 했다. 취하고 씹어야만 그 날의 스트레스를 풀고 내일의 태양을 맞이할 힘을 겨우 얻을 수 있었다. 콩알만 한 작가료를 받는 처지에 우리가 마실 수 있는 술은 소주, 그리고 포장마차의 저렴한 안주들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회식 날, 횟집에 가게 됐는데 나도 모르게 어떤 결의 같은 게 올라왔다. 엄청난 일의 양에 비해 작가료는 쥐똥만큼 받는데, 적절히 계산되지 못한 노동의 대가를 회를 먹는 것으로 보상받겠다는 심정이었다. 회는 삼겹살보다 비싸지 않은가. 음식에 대한 호불호 따위 운운하며 스키다시나 깨작대고 있기엔 그동안 내가 들인 노동의 시간들이 눈물겨웠다. 투사라도 된 듯 회 한 점을 호기롭게 집어 입에 넣은 나는 얼른 삼킬 요량으로 소주를 원샷했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가. 차가운 소주와 어우러진 날것의 식감이 물컹한 게 아니라 탱탱하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쫄깃했다. 혓바닥에 착착 달라붙는 찰진 느낌이 좋았고, 씹을수록 고소했다. 초고추장 말고 와사비장에 찍으니 회 고유의 맛이 고급스럽게 입속으로 퍼졌다. 그렇게 그날, 나는 미처 값으로 계산되지 못한 노동력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만족감을 느낄 만큼 회를 먹고 또 먹었다. 생선회와 함께 마시는 소주는 그야말로 이슬 같았다.
놀라운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늘 술이 안 깨 찌뿌둥하게 일어나던 평소와 달리 맑은 정신으로 벌떡 일어난 것이다. 역시, 소주는 좋은 안주와 먹어야 한다는 인생 선배들의 말은 참이었다. 그날 이후 나의 '최애 음식'은 단연코 생선회였다. 굽거나 튀기거나 조려 먹는 생선보다 날로 먹는 생선이 제일 맛났다. 값비싼 생선회를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만큼 먹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도 맘껏 사줄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미치도록 성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성공 스토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굿 뉴스와 배드 뉴스가 있다. 배드 뉴스를 먼저 말하자면, 값비싼 생선회를 시시때때로 마음껏 사 먹을 만큼 성공하진 못했다. 다행히 굿 뉴스가 있다. 나이를 먹어 체질이 바뀌었는지 차가운 회를 먹으면 아랫배가 살살 아파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된다. 언젠가부터 술도 몸에 잘 안 받는다. 점점 생선회와 술을 사 먹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 이제 생선회를 마음껏 사 먹을 정도로 성공하진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로 먹는 맛'의 유혹에서는 좀처럼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생선을 날로 먹기 좋아하더니 이제는 인생을 날로 먹으려 하는 거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좋은 결과를 얻으면 좋겠다. 많이 먹고 운동하지 않아도 살이 쏙 빠졌으면 좋겠다. 돈 버는 건 힘들고 싫은데, 돈은 많았으면 좋겠다. 로또에 당첨되어 일확천금을 움켜쥐고 싶다. 평생 먹고살 수 있는 돈만 있다면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도 기적처럼 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금고에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한가득인데 소심하고 예민할 일이 어디 있겠나. 아마 나는 세상에서 가장 대범하고 마음 넓은, 신을 닮은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막내작가 시절의 내가 회를 마음껏 사 먹을 수 있는 성공한 사람이 되겠다고 꿈꿨던 것은 야심 찬 욕망이 아닐 수 없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싶을 때 마음껏,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돈과 시간과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마음대로 나의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나의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자유이자 권력이다.
나도 돈과 시간과 사람, 그 모두를 누릴 수 있는 자유와 힘을 갖고 싶다. 이 모든 것을 이왕이면 노력 없이 저절로 얻고 싶다. 날로 먹으려 하는 마음을 두고 사기꾼 심보라고들 말한다. 땀 흘려 노력으로 얻은 것만이 진짜라고 한다. 하지만 땀은 흘리는데 땀냄새 말고는 가질 수 있는 게 없을까 봐 자꾸만 날로 먹고 싶어 진다. 그래도 내 소중한 인생을 날로 먹을 수는 없지.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을 맛있게 구워 먹고 튀겨 먹고 조려 먹을 수 있을까. 내가 가진 삶의 재료들로 최고의 진짜 맛을 낼 수 있을까.
앗,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벌써 토요일 오후가 지나가고 있다. 늦기 전에 로또나 사야겠다. 날로 먹는 건 생선회고, 로또는 로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