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플스테이를 하면서 묵언수행을 한 적이 있다. 말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일은 생각보다 쉬우면서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 느낌은 '말'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말'을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언어로 정의한다면,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도 금세 친해지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라면 경우가 다르겠지만 나에겐 낯선 상황에서 말을 하는 것보다는 하지 않는 편이 더 쉽게 느껴진다.
하지만 '말'의 의미를 '목구멍을 통해 발화되는 소리'가 아니라 '의미를 담은 대화 도구'로 정의한다면, 나는 도저히 말을 멈출 수 없는 수다쟁이였다. 나는 나 자신과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겉으로는 묵언수행을 흉내 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엄청 요란하고 시끄러웠다. 입 밖으로 발화되지 못한 말들이 몸속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출구 없는 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 말들은 대부분이 쓸 데 없는 것들이었다. 상황에 대한 불평이나 타인에 대한 비판, 과거 어느 사건의 기억, 그 기억에 덧붙여오는 회한과 분노의 감정들... 거의가 부정적인 말들이었다. 그 사이사이, 꽃과 하늘과 나무와 고양이와 사찰음식에 대한 감탄의 말들도 가끔씩 흘러나왔다.
불교의 마음챙김 명상(Mindfulness)은 일어나는 생각들의 의미를 따라가지 말고, 그저 하나의 대상으로 알아차리고 흘려보내는 수행법이다. 지금 이 순간 올라오는 생각을 마치 내 집에 온 손님처럼 대하는 것이다. 손님은 어차피 때가 되면 돌아갈 사람들이 아닌가. 내 마음속에 찾아온 시끄러운 수다들도 손님처럼 왔다 갈 뿐이라 여기며 명상을 시작했다.
명상을 하며 가만히 지켜보니 손님이 왔다가 가긴 하는데, 계속 온다. 손님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인기 펜션이 따로 없었다. 그러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운 좋게 찰나의 고요가 찾아왔다. 겉으로만 묵언수행이 아니라 속까지 침묵이었다. 길어야 10초 정도였을까, 금세 또 마음속 목소리가 손님처럼 찾아오긴 했지만 그 잠깐의 평화를 잊을 수가 없다. 마음속에 나만 아는 비밀 공간 하나가 생겨났다. 그 비밀 공간에 세상의 좋은 것은 다 들어있는 것 같았다. 조금씩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고, 우주까진 모르겠지만 세계의 한 조각 정도는 마음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다시 복잡한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묵언수행은 꿈도 꾸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해야 하는 도시의 삶에서 '말'은 피할 수 없는 소통수단이기 때문이다. 다만 명상을 하면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마음으로 하는 묵언수행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내 마음속 말들을 멈추면 상대가 하는 말을 더 잘 들을 수 있다. 상대의 마음에 더 공감할 수 있다. 잘 듣고 공감할 수 있으면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게 된다. 상대와 나 사이에 꼭 필요한 최고의 말들만 오고 갈 수 있다. 대화가 기술이 아니라 예술이 된다면 바로 이런 상태가 아닐까.
제 멋대로 올라오는 마음의 목소리에 끌려 따라가지 않기, 태어나서 말을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아기처럼 그대로 머릿속을 리셋하기, 그 순간 '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텅 빈 하늘이 된 척해보기, 하늘은 언제나 말이 없으니까. 이렇게 하다 보면 나만의 소중한 비밀공간, 고요의 세계로 잠시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 그 비밀 공간에 세상의 좋은 것은 다 들어있는 것 같다고 표현하긴 했지만 사실 그 공간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때로는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것이 있다. 진짜 소중한 것은 말로 표현되지 않을 때 더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많다. 굳이 진부한 표현으로 설명하려다 오해가 쌓이고 불통이 될까 봐, 그래서 소중한 것의 의미가 퇴색해버릴까 봐 조심스러워진다. 깨지기 쉬운 유리잔을 다루듯 섬세하게 전달하고 싶다. '진짜'를 전달하는 방법으로, 나는 침묵 외에 다른 방법은 알지 못하겠다.
쓸데없이 길게 말했지만, 진짜 소중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잠시 당신이 텅 빈 하늘인 척해본다면, 그런 척을 해보다가 잠깐이지만 텅 빈 하늘이 된다면, 텅 빈 하늘이 되어 당신의 마음속 비밀 공간을 발견한다면... 그때 내가 차마 말하지 못한 진짜 소중한 것이 당신에게 가 닿을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