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으로 첫 배낭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런던에서 일주일을 여행하고, 파리로 이동해 3~4일 정도 있다가 여행의 본 목적지인 '플럼빌리지'에서 보름을 머물렀다. 보르도 근교에 위치한 플럼빌리지(Plum Village)는 명상지도자이자 평화운동가인 틱낫한 스님이 세운 명상공동체로, 전 세계에서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이들이 찾아와 고요히 머무는 곳이다.
당시의 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었고, 마음이 만들어내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심은 심정이었다. 그때 내가 잡은 동아줄은 붓다의 가르침이었다. 다행히 썩은 동아줄은 아니었다. 불교 공부를 하고 명상센터를 찾아 명상을 하다가 급기야 플럼빌리지까지 가게 된 것이다.
새로운 것을 처음 하게 될 때 뜻밖에 맞게 되는 성공을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한다. 아마도 명상을 시작하면서 나는 초심자의 행운을 맛보았던 거 같다. 열흘을 굶던 사람이 마침내 쌀죽 한 숟갈을 입으로 넣을 때의 그 느낌, 사막에서 며칠을 헤매며 목마름을 견디던 이가 마시는 첫 물 한 모금의 감각을 명상을 통해 느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요망스러워서 초심자의 행운은 곧 '초심자의 오만'으로 변질되어 버리곤 한다.
삶의 바닥에서 겨우 땅을 집고 일어났는데 그 느낌이 너무도 강렬하여 마치 내가 마라톤 대회 우승자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 거다. 무려 프랑스에 위치한, 그것도 틱낫한 스님이 만든 플럼빌리지에서 보름 동안 명상을 했다는 것은 나에겐 금메달과도 같은 훈장이었다.
프랑스어는 둘째치고 영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기차를 갈아타고 물어물어 그곳을 찾아간 것. 영국, 호주, 네덜란드, 브라질 등에서 온 사람들과 같은 방을 쓰며 친구가 되어 함께 명상을 하고 밥을 먹고 산책을 한 것. 밤새 쥐 한 마리가 내 여행용 캐리어 곳곳을 뒤지며 1회용 설탕을 갉아먹은 일.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 파리로 유학을 왔다가 플럼빌리지로 출가한 한국 비구니 스님을 만난 일 등. 모든 것이 무용담이 되기에 충분했다.
2.
그렇게 플럼빌리지에서의 보름이 지나고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인천행 비행기를 타기까지는 3일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한 달을 계획한 배낭여행의 마지막 며칠이 고요히 흘러가고 있었다. 사실 플럼빌리지에 다녀온 것으로 내 여행은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남은 사흘은 그저 덤이었다. 여행경비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방 하나에 열 명이 함께 머무는 저렴한 도미토리를 구했다. '초심자의 오만'이 본격적으로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도미토리, 그것도 열 명이 한 방을 쓰는 공간은 좁고 시끄러웠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였기에 한국에서 배낭여행을 온 2,30대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혼자 낯선 나라로 여행을 왔다 금세 친해진 이들이 밤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보름의 시간을 고요한 자연 속에서 보내고 온 나는 시끌벅적한 파리의 게스트하우스가 낯설고 불편했다. 다른 여행객들과 섞여 여행의 마지막 추억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럴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한쪽 구석 2층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하지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잠이 올 리 없었다. 짜증이 났지만 조용히 좀 해달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 잠이 오지 않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선 머리 위까지 이불을 덮은 채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내일 보러 갈 오케스트라 공연을 위해 처음으로 비싼 드레스를 샀다는 얘기, 드레스가 너무 파여서 야해 보인다는 얘기,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루이뷔통 본점에서 쇼핑을 했다는 얘기들이 이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 2층 침대 위에서 나는 그들을 비웃었다. 명상과 명품, 플럼빌리지와 루이뷔통의 간극은 수성과 명왕성의 거리만큼 멀게 느껴졌다. 아니 이건 수평적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수직적 가치의 문제였다. 그때의 나에겐 당연히 명품보다 명상이, 루이뷔통 보다 플럼빌리지가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가치 있게 느껴졌다.
3.
이틀 후, 나는 샤를드골 공항에 있었다. 인천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탑승수속 절차를 밟는 중이었다. 내가 예매한 항공권은 일본항공 JAL이었다. 도쿄를 경유해 인천에 도착하는 경로다. 내 차례가 되자 일본인 직원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유창한 영어였지만 일본인 특유의 발음이 낯설게 들려왔다. 가뜩이나 영어가 서툰 나로서는 그저 눈치껏 이해를 해야만 했다.
요지는 내가 항공권 요금을 지불해야만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서울에서 미리 예매를 했고 결제가 끝난 상황이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안 되는 영어로 내 입장을 토로해보았지만 일본인 직원은 단호했다. 내 짐은 이미 수화물 위탁을 마친 상태였다. 요금을 지불하지 못하면 내 짐만 혼자 인천에 도착해 주인을 잃은 채 수화물 컨베이어 벨트를 떠돌게 될 것이다.
문제는 내게 남아있는 돈이 정말이지 한 푼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돌아가는 날까지 필요한 돈을 얼추 계산했고, 30분 전 샤를드골 공항에서 빵과 커피를 구입한 것으로 마지막 남은 돈을 다 사용해버렸다. 신용카드도 없었다. 사실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기차역에서 지갑을 소매치기 당해 신용카드는 애초에 사용하지도 못했다. 다행히 지갑이 아닌 따로 보관해둔 돈으로 어찌어찌 여행을 마칠 수 있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뜻밖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낯선 나라에서 돈도, 신용카드도, 아는 사람도 없다. 오직 혼자. 영어도, 프랑스어도 서툴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다. 이대로 비행기를 타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순식간에 공포가 밀려왔다. 마음을 진정하고 심호흡을 했다. 어쨌든 정신을 차리고 이 난관을 해결해야 한다.
불현듯 생각이 스쳤다. 한국 사람. 샤를드골 공항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한국 사람을 찾아야 했다. 사정을 설명하고 돈을 빌린 다음, 서울로 돌아가 빌린 돈을 송금해주면 되지 않을까.
4.
샤를드골 공항 곳곳을 돌았지만 한국인으로 보이는 동양인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절망이 밀려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때였다. 저만치 낯선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프랑스 샤를드골 공항에서 낯선 얼굴이라니... 그럴 리가 없었지만 분명 아는 얼굴이 틀림없었다.
오늘 아침까지 나와 같은 도미토리를 썼던 한국인, 오케스트라 연주를 보러 간다며 값비싼 드레스를 샀던 여자, 이틀 전 2층 침대 위에서 내가 비웃음을 날렸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삶이란, 참으로 얄궂다. 이건 신의 장난임이 틀림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침대에 엎어져있지만 말고 미리 좀 친하게 지내 둘 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일 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아니, 해야만 하는 일은 그녀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돈을 빌리는 일이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저 모르시겠어요? 파리에서 같은 도미토리 썼던..."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더니, 불과 1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렇게 비굴해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그녀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녀는 나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마치 같은 한국인을 상대로 삥이나 뜯는 사기꾼이라도 된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서울로 돌아가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돈을 빌려야 했다.
그녀는 어찌 된 상황인지 자세히 알고 싶다며 일본인 승무원을 함께 만나보자고 했다.
5.
일본인 승무원은 내게 다시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다. 내 여권을 유심히 살피던 승무원의 얼굴이 뭔가를 발견한 듯 놀란 눈치였다. 어찌 된 일이지? 또 무슨 문제가 발생한 걸까? 마음을 부여잡았다. 다행히 내 옆에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이 있다는 것이 의지가 되었다.
순간, 상황이 역전됐다. 일본인 승무원이 특유의 예의를 갖춰 미안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닌가. 승무원은 내 성(family name)의 알파벳 표기를 잘못 보았다고 했다. 내 성은 영어로 'Cho'로 표기되는데, 'Choi(최)'와 헷갈렸던 거였다. 그러니까 요금을 지불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최혜영'이란 한국인 승객이었다.
이런 상황을 만든 일본인 승무원에게 화가 났다. 30분 넘게 나를 공포에 떨며 마음 졸이게 했던 승무원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녀의 실수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어찌 됐든 나는 항공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러니 돈을 빌리지 않아도 되었다. 같은 도미토리를 썼던 그녀는 일이 잘 해결되어 다행이라며 인사를 했다. 나는 그녀에게 고마웠지만 한편으로 미안했다. 미안한 이유에 대해서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였던 그녀의 얼굴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일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평범한 직장인의 얼굴. 어쩌면 그녀 또한 나처럼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며 벼르고 별러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나온 건지도 몰랐다. 고된 자신의 삶에 선물을 주듯 말이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보러 가기 위해 값비싼 드레스를 산 것은 그녀가 사치스럽고 속물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축제로 만들고 싶은 사람, 그만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파리에서 드레스를 사 입고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감으로써 그동안 나를 사랑하지 못했던 날들에게 위로를 보냈던 것인지도. 서울로 돌아간 그녀가 파리에서 산 드레스를 입을 기회는 몇 번이나 될까. 어쩌면 그 드레스는 입기 위한 것이라기 보단 간직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긴 시간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으려는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프랑스에서 플럼빌리지를 찾은 것이나, 그녀가 값비싼 드레스를 산 것이나 결국은 같은 일이었다. 나의 플럼빌리지와 그녀의 값비싼 드레스는 수직적 가치로 판단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신이 있다면 신은 장난스럽고 짓궂은 연출자임이 분명하다. 샤를드골 공항에서 내가 그녀에게 돈을 빌리게 하는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나를 난관에 빠뜨렸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신은 너그럽고 현명한 기획자다. 자신이 만든 난관에서 나를 꺼내 주었고, 낯선 나라에서 누군가와 하나로 연결되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나를 배우게 했고, 성장시켰다.
여행을 삶의 축소판이라고 한다면, 파리에서 생긴 일은 내 인생의 상징적 장면이 되기에 충분하다. 살면서 만나는 이들을 내 잣대로 평가절하할 자격이 나에겐 없다. 내가 비웃고 욕한 이들에게 또 언제 도움을 요청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나는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며 나는 시끄러운 파리에서, 복잡한 샤를드골 공항에서 반짝이는 새벽 별을 만났다. 고요한 플럼빌리지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밤의 터널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