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파티시에가 있었다. 그의 꿈은 ‘제대로 된 비스킷’을 만드는 것이었다. 다양한 재료와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여 그는 몇 날 며칠 비스킷만 만들었다. 그럼에도 결과는 늘 실패였다. 어떻게 해도 ‘제대로 된 비스킷’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쯤 되면 우리는 이런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다. 그가 실력 없는 파티시에였음에 틀림없다고.
하지만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그는 자신이 '제대로 된 비스킷'을 만들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됐다. 어릴 적 필스버리 비스킷을 좋아했던 그에게 비스킷은 곧 ‘필스버리’였다. '비스킷=필스버리'라는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을 만들어 놓고 비스킷을 만들었으니 자신이 만든 비스킷은 늘 기준 미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그의 눈에 자신이 만든 비스킷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모양과 크기와 맛이 천편일률적인 비스킷과는 전혀 달랐다. 매일매일의 비스킷이 모양도, 크기도, 맛도, 향도 전부 각양각색이었다. 그날그날 구워낸 '오늘의 비스킷'은 그 자체로 충분히 훌륭했다. 릴케의 시를 인용해 표현하자면 그의 비스킷은 ‘빛나고 소박하고 진실한’ 비스킷이었다.
이 이야기는 임상심리학 박사이자 미국의 저명한 불교 명상가, 타라 브랙(Tara Brach)이 자신의 책 <받아들임(Radical Acceptance)>에서 소개한 내용이다. 이 부분을 읽어 내려가며 뒤통수가 묵직해져 왔다. 둔탁한 무언가로 한 대 제대로 맞은 느낌이었다. ‘제대로 된 비스킷’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파티시에에게서 내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그가 ‘필스버리 비스킷’이라는 비스킷에 대한 제 나름의 완벽한 틀을 갖고 있었듯이 나 역시도 성공한 모습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나만의 프레임을 만들어 놓고는 그것이 아닌 다른 삶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니 늘 '제대로 된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그 파티시에가 어떻게 해도 '제대로 된 비스킷'을 만들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뭘 해도 실패한 자, 아직 이루지 못한 자, 겨우 이것밖에 달성하지 못한 자가 된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노력해도 끝내 내가 만든 완벽한 기준에는 영원히 이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다다르고자 하는 욕망의 높이와 반비례해 결핍감은 마음에 깊은 구멍을 낸다. 아마도 기억나지 않는 언젠가 TV 드라마나 광고에서 보았을지 모를, 혹은 남몰래 부러워했던 누군가의 모습에서 이상적 모습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라캉이 말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멋져 보이는 사람들이 그들만큼이나 멋진 친구들과 화려한 파티를 즐긴다. 최신식 가구와 전자제품, 모던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집에 살고, 고급스러운 차를 타는 사람들의 일상에는 구김살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인다. 교양 있고, 지성미 넘치고, 남다른 자신감으로 늘 이기며, 심지어 우아하기까지 한 TV 광고 속 그들의 완벽한 모습이 머리로는 진짜가 아닌 줄 알면서도 마치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할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모습을 '완벽'이라 규정한 자아는 내 집의 낡은 가구와 구식 전자제품, 오래된 중고차, 어디다 내놔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의 삶을 볼품없고 빈약한 인생으로 쉽게 판단해버리고 만다. 비극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비교는 한 영혼을 한없이 움츠려 들고 찌그러트린다.
TV 광고야 그렇다 치더라도 현실에서, 그것도 가까운 사람이 나의 비교 상대가 될 때는 그야말로 배가 아파온다. 어떤 약으로도 결코 치료될 수 없는 심각한 복통이다. 이런 복통을 느낄 때마다 나는 누군가의 발에 밟혀 납작하게 찌그러진 깡통 캔이 된 것만 같다. 열등감이 아닌 우월감을 갖게 만드는 비교 또한 마찬가지다. 어차피 우월감은 열등감의 다른 표현일 뿐, 동의어나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그 무엇과도 비교하지 않고 나와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어떤 모습일까. '필스버리 비스킷'과 더 이상 비교하지 않은 채 자신이 만든 비스킷을 맛 본 파티시에의 표현대로, 나의 삶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나름의 소박함과 진실함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지 않을까.
비교를 내려놓으면 결핍도, 실패라 이름 붙일 것도 없다. 모양이 조금 삐뚤어졌으면 삐뚤어진 대로, 바삭하면 바삭한 대로, 촉촉하면 촉촉 한대로, 그 자체로 '오늘의 비스킷'일 뿐이다. 1g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레시피로 공장에서 찍어낸 비스킷보다 그날의 공기와 온도, 습도, 만드는 이의 기분에 따라 매일매일 달라지는 비스킷을 맛보는 것이 더 흥미롭지 않은가.
그런 비스킷에는 시공간의 우연과 조합이 만들어내는 유일함이 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단 하나뿐인 비스킷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그것은 신비이자 우주의 작품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온 마음을 다해 비스킷을 만들고 온몸으로 비스킷을 맛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지금, 여기'가 아닌 '지금 보다 더 좋은 때', '여기보다 더 멋진 곳'만을 생각했다. 성장하기 위해 미래로 나아가는 시선이 아니라 부족한 현재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미래를 좇은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를 부정할 때, 꿈에 그리는 미래 또한 찾아오지 않았다. 미래는 실체가 없는 이름이다. 미래는 현재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니 '장밋빛 미래'를 바란다면 현재라는 텃밭에 장미꽃을 심고 그 향기를 직접 느끼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
내가 만든 삶이라는 비스킷은 어떤 모양일까. 어떤 향기와 맛이 날까. 부드러운 지 딱딱한 지, 버터 향이 나는지 바닐라 향이 나는지... 나의 오늘을 깊이 음미하며 맛보고 싶다. 오늘도 나는 오늘의 비스킷을 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