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늦은 저녁, 하루의 첫 세수를 하고 집을 나왔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커피도 마셨고 간단히 밥도 먹었고 설거지도 했고 바닥을 뒹굴며 책도 조금 읽었고 낮잠도 잤다. 오랜만에 푹 쉬기로 작정을 하긴 했지만 밖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죄책감 같은 것이 밀려왔다.
‘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돈을 버는 일, 목표를 향해 다가가는 일, 창조적인 일, 생각하는 일 등을 하지 않은 자신을 탓하며 불안해하는 것이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할 순 없지만 어느 순간 나의 관념 속엔 생산적인 활동을 해야만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말이다.
머리로는 휴식과 재충전도 반드시 필요하고 의미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에서 진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나의 삶을 생각할 때면 기준이 좀 더 엄격해진다. 그날 하루를 마감하며 생산적인 활동과 비생산적인 활동의 대차대조표를 나도 모르게 만들고 있다. 헛되어 보냈다고 여겨지는 날에는 화장실에서 뒤처리를 하지 않고 나온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든다.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버린 대가로 삶이라는 배가 좌초에 부딪히진 않을까 두려워지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멍 때리는 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이 의미 있는 행위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내가 ‘의미 있음’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불안한 마음 안에 숨겨진 깊은 욕망을 들여다본다. 내게 ‘의미가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알랭 드 보통이 『불안』이라는 책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나의 불안도 현대 사회의 ‘사회적 지위(status)’와 관련된 불안과 맥을 같이 한다.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세상의 시선에서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선 부족한 게 너무도 많기에 불철주야 노력하며 허송세월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생각이 내 마음의 끝자리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세상의 시선에서 가치 있고 중요한 사람이 되기 위한 수단으로 글을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물론 ‘글을 쓴다’는 동사적 행위가 작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맞다. 글을 쓰지도 않으면서 명사로서 작가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일해지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성실히 글을 쓰는 일은 중요하다.
부지런함, 성실함은 분명 미덕이다. 문제는 그것이 욕심과 만났을 때 집착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집착을 품은 부지런함의 경우, 부지런해 보이는 행위 그 밑바닥엔 불안으로 버둥거리는 두 발이 디딜 곳을 찾지 못한 채 붕 떠있을 확률이 높다. ‘글을 쓴다’는 동사적 행위보다 ‘작가’라는 명사적 지위에 집착해 거기에서 의미를 찾으려 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불안을 잉태한 비생산적인 활동이 될 수밖에 없다. 재충전을 위한 대단히 생산적인 활동일 수도 있는 데 말이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던 30대 중반, 유럽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었다. 그때 프랑스 보르도 근교에 위치한, 베트남 출신의 스님이자 평화운동가인 틱낫한 스님이 만든 명상공동체 ‘플럼 빌리지(plum village)’에서 보름을 머물렀었다. 그곳에서는 일주일을 기준으로 매일매일 정해진 일정이 있다. 새벽 예불을 하고, 걷기 명상을 하고, ‘쓰레기를 어떻게 꽃으로 만들 수 있을까?’와 같은 화두로 토론을 하고, 수북이 쌓인 낙엽을 치우기도 한다. 특이했던 것은 일주일에 하루, ‘게으름의 날(lazy day)’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은 정해진 아무 일정도 없다. 자기 마음대로 쉬고 싶으면 쉬고 놀고 싶으면 노는 날이다. 게으름을 피운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마음껏 게으름을 피워야 하는 날이다. 그날 스님들은 새벽 예불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쉬거나 예쁜 단풍잎을 줍거나 노래를 불렀다. 출가자 혹은 수행자의 삶을 떠올릴 때 ‘게으름’은 피해야 할 덕목이라 여겼던 내겐 낯선 풍경이었다. 게으름이 만들어내는 여유가 일상을 새로운 리듬으로 채우는 것 같았다. 그들은 무언가가 될 필요가 전혀 없어 보였다. 그 순간 자신이 있는 그곳에서 있는 그대로 평화로웠다.
생각해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그때의 느낌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살아온 것 같다. 이제 나에게 게으름을 기꺼이 허해야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싶다. 생산적이라는 개념을 적용해 따져보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 때리는 일은 남는 장사다. 생각이 멈춰진 뇌야말로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 최적이라고 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