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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머그컵은 어떤가요?

by 조혜영


주말에 마트에 갔다가 머그컵을 두 개 샀다. 행사상품으로 진열돼있는 것을 보고는 충동구매했는데, 색깔의 배합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나는 회색과 갈색이 묘하게 섞인 바탕색에 손잡이와 입이 닿는 컵의 위 테두리 부분은 자주색이고, 다른 하나는 채도가 낮은 진한 연두색 바탕에 손잡이와 위 테두리 부분은 보라색이다.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우러진 색의 조화가 흑백의 일상을 새롭게 만든다. 손잡이를 쥐었을 때 그립감도 나쁘지 않다. 기분 탓이겠지만 새로 산 머그컵에 커피를 내려 마시니 똑같은 커피인데도 맛이 더 좋은 것 같다. 작은 박스에 함께 들어있던 부직포로 만든 컵받침도 마음에 든다...



여기까지가 새로 산 머그컵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이자 개인적인 감상의 표현이다. 위 글을 읽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과 느낌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부족한 묘사와 설명을 통해 나와 같은 느낌을 공유하게 된다거나 이와 비슷한 자신의 경험을 떠올린다면 작게나마 소통은 이루어진 것일 테다.


글이란, 쓰는 이의 행위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읽는 이의 행위의 결과가 더해졌을 때 비로소 그 존재 의미가 명확해진다. 내가 쓴 글을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물론 글을 썼다는 자체로 의미가 없진 않다고 위안을 할 때도 있지만- 그 글은 반쪽짜리 글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의 감촉이 타인에게 어떻게 가 닿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마트에 진열되어 있던 머그컵은 내게로 와서 주관적인 사물이 되었다. 혼자서 머그컵을 바라보며 마음에 들어하거나 그 만족감을 일기에 적는 것은 주관적인 경험이므로 무엇이 됐든 상관없다. 문제는 ‘그 머그컵’으로 '낯선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을 때이다.

직접 보여주거나 사진을 찍어 보여주지 않는 한 누구도 그것의 실물을 확인할 수 없다. 누군가를 집에 초대해 새로 산 머그컵에 커피를 내려 함께 마시지 않는 한, 그 머그컵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공기를 전달할 수 없다. 손끝을 통해 글로 표현된 묘사와 설명이 머그컵의 실물과 그 날의 공기를 대신한다. 주관적인 경험이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 다수와 공유되는 것이다.


혹여 주관적 경험을 공유하고 소통하고 싶다는 의도가 개인적 취향이나 감수성, 지식에 대한 자랑으로 표현되지 않을까 경계한다. 자기표현이 자만이나 우월감, 고압적 태도로 변질되는 것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머그컵이 얼마나 예쁘고 내게 소중한지 알아요? 그러니 당신들도 내 머그컵을 좋아해야 해요. 내 안목 대단하죠? 어떻게 이렇게 예쁜 머그컵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글이 아니라 ‘나의 머그컵은 이렇습니다. 그런 머그컵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당신의 머그컵은 어떤가요? 머그컵이 아니라면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가장 사적인 것으로 가장 보편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기에. 내 가슴에서부터 흘러나와 손끝으로 전달된 이야기가 낯선 이의 살갗을 넘어 마음 깊숙한 곳에 가 닿을 수 있음을 믿고 싶다.


때로는 글이 아니어도 괜찮겠지.

비 내리는 어느 여름 날 오후, 두 개의 머그컵에 커피를 나눠 마시며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도 좋을 것 같다.

그 날의 공기를 함께 공유하고 싶다.

어떤 묘사나 설명도 필요 없는 그 순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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