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나를 웃게 하고 불쑥 눈물짓게 하는) 감정의 사물들 Ep.04
낭패감 [낭ː패감] : 계획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기대에 어긋났다는 느낌
거실 벽시계를 보며 외출 준비를 하다 약속 시간에 늦고 말았다. 언젠가부터 벽시계가 10분 늦게 가고 있었는데 미처 몰랐던 거다. 중요한 약속이라 지각하면 안 되는 자리였는데 뒤늦게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어찌나 마음 졸였는지… 상대를 기다리게 했다는 미안함과 시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민망함이 동시에 밀려와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지 않은 벽시계에게 화가 났다.
그날, 만났던 상대와 함께 하기로 한 일은 결국 어그러졌다. 내가 시간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원래 일이라는 건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어서 안 될 듯하다가 잘되기도 하고, 잘 될 듯 순조롭다가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엎어지기도 하니까.
이번 작업은 사정상 진행하지 못하게 됐다는 상대의 연락에, 괜찮으니 마음 쓰지 말라는 말로 난처해하는 상대를 안심시키고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이게 무슨 감정이지? 멍한 시선 끝에는 벽시계가 말없이 걸려 있었다. 10분 늦게 가던 시계는 11분, 12분 점점 늦어지더니 급기야 멈춰버리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한 단어가 한숨처럼 터져 나왔다. 낭패감……
그랬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분명 낭패감이었다. 실패감도 아니고 낭패감이라니. 더구나 낭패감이라는 말은 평소에 자주 쓰는 말도 아니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낭패(狼狽)’의 ‘패(狽)’와 ‘실패(失敗)’의 ‘패(敗)’는 한자가 달랐다. 당연히 같은 한자일 거라고 생각했던 예상이 빗나갔다. ‘낭패’의 의미를 더 찾아보니 낭패는 중국 고사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었다. 뒷다리가 없는 ‘낭(狼)’과 앞다리가 없는 ‘패(狽)’가 한 몸처럼 붙어 있다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떨어진 것을 보고 ‘낭패를 보았다’라고 말한다고 했다.
나는 이번 일을 잘해보고 싶었다. 간절히 바라던 일이었고, 준비도 많이 했다. 내 삶에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유야 어찌 됐건 '낭'과 '패'가 서로 떨어져 어긋나듯이 그 일이 나로부터 툭하고 떨어져 나가 버렸다. 나의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린 것 같았다. 이대로 내 삶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순간, 고장 난 벽시계가 눈에 들어온 것은 어쩌면 삶에 대한 깊은 은유가 아닐까.
멈춰버린 시침과 분침을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애써봤지만 제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을 때, 벽시계도 낭패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멈춰버린 시계는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다. 자신의 시간 또한 그렇게 정지되고 만다.
벽시계에 좀 더 관심을 가졌다면, 시간이 정확히 맞지 않는다는 걸 발견하고 배터리를 제때 교체해주었다면, 그랬다면 내가 간절히 바라던 그 일도 똑딱똑딱 시침과 분침이 흘러가듯 순조롭게 진행되었을까. 이제 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희망은 있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시간이 잘 맞지 않는가. 나의 거실 벽시계는 오전 10시 23분과 밤 10시 23분을 정확히 알려준다. 한동안 나는 그 시간이 되길 몇 분 전부터 기다리고 있다가 일부러 벽시계를 보며 오전 10시 23분과 밤 10시 23분을 맞이했다. 그때만큼은 어떤 낭패감도 느낄 수 없었다. 완벽한 성공이었다.
멈춰버린 것만 같은 나의 시간도 분명 세상의 시간과 시침과 분침이 일치하는 때가 올 것임을 안다. 고장 난 시계는 고치면 되고, 멈춰버린 시계는 배터리를 교체해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