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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Oct 28. 2022

빈 술병
; 흐릿한 그리움

(때로 나를 웃게 하고 불쑥 눈물짓게 하는) 감정의 사물들 Ep.05


그리움 [그리움] :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 




한 번은 집에서 몇몇 친구와 밤늦게까지 와인을 마신 적이 있다. 다음날 친구들이 돌아가고, 혼자 지난밤 마신 빈 술병들을 정리하다가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엉뚱하게 술병 하나를 뒤집어 보았다. 남아있던 와인 몇 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우나에 앉아있는 사람처럼 숙취로 땀을 찔찔 흘리며 나는 생각했다.


'아, 술병은 모래시계가 아니지…….'


빈 술병을 뒤집어 놓는다고 해서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사라진 술이 다시 채워지진 않는 법이다. 나는 대체 빈 술병을 모래시계처럼 뒤집어서 무엇을 되돌리고 싶었을까. 술을 마시기 전 쌩쌩했던 컨디션으로 돌아가고 싶었거나, 혀끝을 달콤쌉싸름하게 적시던 맛 좋은 와인이 화수분처럼 다시 솟아나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나는 내 진짜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빈 술병이 되기 전, 술이 가득 차 있거나 아직 반쯤은 남아있던 지난밤의 시간이 그리웠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술을 마시며 친구들과 함께 나눴던 대화와 대화를 가득 채웠던, 말이 되기도 하고 말이 안 되기도 했던 문장들과 술에 취해가는 와중에도 그 문장들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게 만든 촌철살인의 단어들이 채 하루도 되기 전에 벌써 그리워졌던 거다.


달이 차오르면서 술도 같이 차오르던 시간, 술이 차오르면서 우리의 기쁨과 슬픔과 후회와 분노와 흥분도 함께 차올랐다. 그리고 마지막 술병의 마지막 술이 각자의 잔에 채워졌을 때 늘 그랬듯이 누군가는 울었다. 눈물을 흘리고 만 이가 친구 K였는지, P였는지, 아니면 나였는지 기억은 흐릿하다. 결국 눈물은 전염되기 마련이어서 우리는 서로를 붙잡고 울거나, 혹은 우는 걸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돌리고 훌쩍였을 테다.  


빈 술병들을 분리수거장에 버리려고 들고나갔다가 나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어젯밤의 흐릿한 기억을 조금 더 간직하고 싶었다. 전날까지 우리의 시간을 함께 빛내주던 술병이었는데, 이제 비어버렸다고 바로 내다 버리는 게 어쩐지 매몰차게 느껴졌다. 


꽤 오래전엔 술을 좋아했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맛있는 안주를 앞에 두고 술잔을 들이켜는 일을 사랑했다. 이제는 예전만큼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술 마실 때의 기쁨에 비해 술 마신 다음 날의 고통이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숙취로 인한 두통이나 울렁거림보다 붙잡을 곳 없는 그립고 휑한 마음이 더 견디기 힘들어졌다.


이제 술병을 부여잡고 같이 웃고 울던 친구들도 만나기 어려워지고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사람들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저마다 흩어졌다. 가수 선우정아의 노래처럼 ‘만나는 사람은 줄어들고 그리운 사람은 늘어간다’.


가끔 작은 술집들이 자리한 골목을 걷다 보면 빈 와인병과 빈 수입 맥주병이 늘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술집, 술집과 골목, 골목마다 누군가의 수많은 그리움이 흐릿하게 묻어있다. 빈 술병들이 지나가는 나에게 묻는다. 그리운 마음을 잊고 살진 않느냐…… 오늘은 오랜만에 와인을 한 병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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