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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Oct 25. 2022

브래지어
; 고정되어야만 하는 답답함

(때로 나를 웃게 하고 불쑥 눈물짓게 하는) 감정의 사물들 Ep.03


답답하다 [답따파다] : 숨이 막힐 듯이 갑갑하다.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브래지어부터 풀어 버린다. 아마도 내게 속한 사물들 가운데 가장 홀대받는 사물이 바로 브래지어가 아닐까 싶다. 특별히 귀하게 여기지도 않고 고마워하지도 않으며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 말이다. 브래지어는 착용하지 않아도,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답답해진다. 


디자인이 아무리 화려하고 매혹적이라 해도 브래지어를 보면 어떤 사명감 같은 게 느껴진다. 잔뜩 긴장한 채 맡은 바 임무를 다해야 한다는 각 잡힌 각오가 엿보인다고 할까. 단단하게 가슴을 떠받쳐 올리고 아름다운 형태로 고정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굳은 다짐이다. 특히나 봉긋 솟아있는 부분은 인위적이어서 두 주먹을 꽉 쥐고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온 힘을 빼고 축 늘어진 브래지어를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본 적이 없는듯하다. 만약 그런 브래지어라면 수명이 다했거나 제 기능을 못해 곧 버려지겠지. 빨래 건조대 위에 매달린 축축한 브래지어도 형태만은 고정된 모양 그대로다.


여성이라면 으레 그렇듯이 나 또한 사춘기를 지나면서 가슴이 봉긋해졌고 엄마가 사다 주신 브래지어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다만 질문하지 않았다. “브래지어를 왜 해야 하나요?”라고.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브래지어를 보며 자라왔고 어느 정도 가슴이 커지면 외출할 때는 브래지어를 해야 하는 게 예의라고 당연히 받아들였다. 물론 내 가슴에 대한 예의라기보다는 밖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에 대한 예의였지만. 가슴이 처진다거나 흔들리는 게 보일지 모른다는 이유로 브래지어를 착용한다는 것은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냥, 남들도 다 하니까 나도 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브래지어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거다. 


그 이후로 몇십 년간 브래지어를 착용하면서 좋은 점보다는 안 좋은 점이 더 많았다. 명치가 답답하게 조여와 소화도 안 되고, 여름에는 땀이 차서 덥고, 가끔 공적인 자리에서 끈이 흘러내리거나 버클이 풀어져 곤혹스러울 때도 있었다.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건강은 물론 미용을 위해서도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는 게 더 좋다고 하는데, 건강 때문도 미용 때문도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이유로 브래지어를 해야 한단 말인가. 


요즘은 ‘노브라’를 이야기하는 시대이지만 그래도 아직 노브라로 마음껏 다닐 만큼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롭진 못하다. 다행히 날씨가 쌀쌀해지는 계절에는 입는 옷이 두꺼워 가끔 브래지어 없이 나갈 때도 많다. 그마저도 집 근처 마트를 간다거나 할 때뿐이지만. 


내가 일상에서 브래지어를 외면하고 소외시킬 때마다 내 옷장 서랍 속 브래지어들은 어떤 마음일까. ‘노브라’의 시대가 정작 브래지어에겐 해방일까, 아니면 하나의 사물로서 존재를 부정하게 하는 또 다른 억압일까.


아무리 나를 답답하게 하는 브래지어이지만 그것들을 버리고 싶진 않다. 만일 내가 예술가라면 내 서랍 속 브래지어들을 다 꺼내고 옆집과 윗집, 아랫집에 사는 여성들의 브래지어들까지 한데 모아 빛이 잘 드는 길목에 걸어두고 싶다. 실험적인 설치미술 작품처럼 말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의 리듬을 따라 흔들리고 햇볕이 비추면 색색으로 반짝이는 브래지어들의 축제를 보고 싶다. 브래지어도 더 이상 무거운 가슴을 떠받들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하고 자유로울까. 노브라의 시대, 이거야말로 브래지어의 진정한 해방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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