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나를 웃게 하고 불쑥 눈물짓게 하는) 감정의 사물들 Ep.10
자유롭다 [자유롭따] : 구속이나 속박 따위가 없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알려진 황산에 올랐을 때 그 풍경에 압도되는 경험을 했다. 코끼리 바위라고도 불리는 오키나와의 만좌모에서 바라본 석양도 절경이었다. 아직 우유니 소금사막이나 그랜드캐년, 티티카카 호수는 가보지 못했고 오로라도 본 적은 없지만 광활한 자연 앞에 선 느낌이 어떠할지는 조금이나마 짐작이 간다.
아마도 그건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대상에 대한 경외심이 아닐까. 답답한 일상과 협소한 생각에 구속된 인간이 신을 닮은 자연에게 느끼는 헌사의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서론이 거창했는데, 나는 가끔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칠 때마다 거대한 자연을 마주할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곤 한다. 컴퓨터 키보드는 자음과 모음, 숫자와 다양한 특수기호의 조합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세계를 만들어낸다. 키보드를 치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세계가 키보드를 침과 동시에 모니터 화면에 문장이라는 형태로 구현된다.
문장은 세상 모든 것, 세상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까지 전부 표현할 수 있으니 감히 자연보다 위대하다. 자연보다 위대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바로 컴퓨터 키보드인데, 어찌 대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외형은 그저 플라스틱으로 만든 공산품에 불과하겠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고 바라본다면 컴퓨터 키보드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사물이다.
어떤 말도 담아낼 수 있고, 어떤 이야기도 만들 수 있고, 심해 속 세상과 우주 끝 세상까지 가보지 않고도 표현할 수 있다. 자음 자판과 모음 자판만 조화롭게 움직여준다면 어떤 속박이나 걸림도 없다. 겁 없이 담대하고 거침없이 자유롭다.
따지고 보면, 속박이나 걸림은 키보드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키보드를 치는 이의 문제일 경우가 더 많다. 나만 해도 글을 쓸 때마다 컴퓨터 키보드를 자유롭게 두드리지 못할 때가 종종, 아니 자주 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 그렇다. 키보드는 언제나 오픈 마인드로 자신을 마음껏 두드려달라 준비하고 있는데, 나는 매번 주저하고 망설인다. 손가락 힘이 너무 세서 키보드가 아플까 봐 걱정하는 박애주의자가 나는 절대 아니다.
펜 끝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지만 이제는 그것도 옛말이 되었다. 컴퓨터 키보드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세상이다.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인데, '키보드 워리어(keyboard warrior)'라는 이름으로 무책임한 전사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컴퓨터 키보드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면, 망설일 것도 없이 답은 하나다. 살릴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게 맞다.
컴퓨터 키보드라는 무한한 가능성과 담대함을 도구로 삼아 그랜드캐년처럼 꿈틀대고 오로라만큼이나 빛나는 글을 쓰고 싶다. 언젠가 내가 그런 글을 쓸 수 있다면 그 영광을 기꺼이 키보드에게 돌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