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데미안>, 헤르만 헤세, 민음사, p.7
소설 <데미안>은 작가 혹은 극 중 화자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이 문장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은 무엇이지? 왜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첫 번째 질문.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둘러싼 두 개의 세계를 생각했다. 가족을 포함한 공동체 속에서 크고 작은 규범에 따라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세계. 그리고 오로지 나로 존재하는 세계.
헤세가 말하는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은 후자의 세계에서 살아갈 때 나오는 어떤 열망, 순수한 기쁨 같은 게 아닐까. 열망과 기쁨이라는 단어 자체는 보편적이지만, 그 단어를 채우고 있는 감정의 본질은 개별적이다. 자신이 지닌 열망과 기쁨의 모양만큼 우리의 삶은 고유한 색을 내뿜는다.
문장을 바꿔 다시 질문을 던진다. "나의 열망과 기쁨은 무엇일까?"
답을 찾기 위해 내 속을 들여다본다. 마음 한구석에 열망과 기쁨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무엇이 갓 뭍으로 잡혀 올라온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위태로운 숨을 쉬고 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은 자유롭게 나를 표현하고 싶은 열망, 그 순간 느끼는 살아있다는 기쁨이었다.
두 번째 질문.
“그렇다면, 왜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 어려운 일일까?”
구체적으로 질문해보면 이렇다.
나의 경우, 왜 자유롭게 나를 표현하면서 살아있다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악당 프로크루스테스가 떠올랐다. 그가 살고 있는 집에는 침대가 하나 있다. 그 침대는 숙면을 취하기 위한 가구가 아니다(그렇다고 ‘과학’은 더더욱 아니지만).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일종의 살인 도구다. 엄밀히 말하면 살인을 위한 계측 장치라고 할까.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여행자를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눕혀 침대보다 키가 크면 머리나 다리를 잘라 죽이고, 키가 작으면 침대 크기에 맞게 늘려 죽였다.
내 안에도 침대가 하나 있다. 세상이 좋다고 말하는 것,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가르친 방식, 남들이 인정하는 기준이 바로 그것이다. 앞서 말한, 공동체 속에서 규범에 따라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바로 그 세계에 속한 것들이다. 옳다고 믿었던 침대의 크기에 맞게 나의 넘쳐나는 부분은 잘라내고, 모자라는 부분은 늘리려 했다. ‘낡은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럴싸한 겉모습을 지니게 되었지만 마음은 기형이었다. 상처와 아픔은 당연한 결과였다. 어쩌면 '진짜 나'는 넘쳐서 잘라낸 부분, 모자란 여백 사이 어디쯤에 있을지 모른다.
다시 헤세의 질문으로 돌아가 내 식으로 답을 하면 이렇다.
“나는 자유롭게 나를 표현하며 살아있다는 기쁨을 느끼고 싶었지만,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에 남들이 만든 기준에 맞추느라 그렇게 살지 못했다.”
언젠가 서강대학교 최진석 교수가 한 강연에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남이 만든 기준을 따르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스스로 기준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고.
'낡은 나'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내 안의 규격 사이즈 침대를 발견하는 일이다. 새로운 나를 만나는 첫걸음은 낡은 나를 알아차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바로 볼 수 있어야 나아가야 할 방향 또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헤세는 말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 <데미안>, 헤르만 헤세, 민음사, p.9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 <데미안>, 헤르만 헤세, 민음사, p.172
헤세가 걸어갔고 앞서 태어난 모든 이들이 걸었던 그 길에...
지금,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