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를 보지 못하더라도

by 조혜영


새해 초 오래된 친구에게서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모리사와 아키오 작가의 소설 <무지개 곶의 찻집>이다.

앞서 소개했듯,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커피에 주문을 거는 에쓰코 할머니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에쓰코의 찻집에는 무지개 그림 액자가 걸려있는데, 찻집을 찾은 손님들-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이끌린 듯 찻집을 찾아온다-은 무지개 그림에 매료되어 마음을 치유받는다. 심지어 돈을 훔치러 들어왔던 도둑조차 무지개 그림의 아우라에 그만 자신의 본분(?)을 잃고 만다. 대체 어떤 그림이기에?


그 그림은 몇십 년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재능 있는 화가였던 에쓰코 남편의 작품이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에쓰코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남편이 무지개를 보았다는 바다로 향한다. 그 바다가 보이는 절벽 끝에 찻집을 차린 에쓰코는 자신의 남은 인생 내내 남편의 그림 속 무지개가 실제로 뜨기만을 기다린다.

마치 무지개를 실제로 보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라도 되는 듯이, 틈만 나면 찻집의 커다란 창으로 바다를 내려다본다. 그런데 그 무지개 말이야, 대체 언제쯤 뜨는 건데? 에쓰코가 살아있는 동안 과연 뜨기나 할까? 책을 읽는 내내 내 안의 목소리가 자꾸 시끄럽게 말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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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보면, 왠지 소풍날 보다 소풍 전날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소풍 전날은 평소에는 잘 먹지 못하던 좋아하는 과자를 마음껏 살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엄마와 김밥 재료를 준비하고 내일 입고 갈 옷을 머리맡에 올려놓으면 잘 준비가 끝이 나지만, 소풍 전날의 밤은 잠을 자기 위한 밤이 아니었다. 내일의 기쁨을 미리 만끽할 수 있는 밤... 길고 지루한 밤이 아닌 무언가 기대를 품은 설렘의 밤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어떤 성취감 보단 기대감을 더 사랑했던 것 같다. 그 기대감은 성취될 수 있다는, 그러니까 내일의 소풍이 성공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소풍날 아침 비가 온다거나, 예쁘게 싼 김밥이 그만 상했다거나, 보물 찾기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상황 같은 건 애초에 머릿속에 없다는 뜻이다.


문제는 인생의 대부분, 기대했던 것과 달리 소풍날 아침 비가 오고, 김밥이 상하고, 보물 찾기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일이 많다는 데 있다. 성취감보다 기대감을 더 사랑했던 것도 성취되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잠재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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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무지개를 기다리는 에쓰코의 마음은 어땠을까 궁금하다. 사랑에 헌신하듯 커피를 내리는 수행자이자 삶의 예술가로 살아가는 에쓰코의 인생은 물론 너무 아름답지만 내게는 어쩐지 쓸쓸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내가 경험했던, 기대감이 품고 있는 공허의 감정을 그녀의 삶에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직 공허를 깊은 충만으로 연마해낼 연륜은 없는 모양이다. 나는 아직, 내 평생, 죽기 전에, 반드시 무지개를, 보고만 싶다!


소설 속 에쓰코의 조카 고지는 말한다.


망설여질 때 로큰롤처럼 살기로 하면 인생이 재미있어지지... 늘 자신을 설레게 하는 쪽으로 가는 거야... 다소 위험이 따르더라도 말이야. 사람이란 뜻밖에 잘 쓰러지지 않거든. 열심히 하기만 하면 절실히 필요할 때 반드시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주지.

- <무지개 곶의 찻집>, 모리사와 아키오, 샘터, p.105


그렇게 말한 고지도 로큰롤을 평생 하지는 못했다. 다만, 고지의 인생에서 로크롤은 선택의 순간 인생의 방향을 알려주었다. 자신을 설레게 하는 쪽으로 향하더라도 끝내 이루지 못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기대감이 성취감으로 이어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할 때인가. 그걸 받아들이면 좀 더 성숙한 어른이 되려나? 그렇다면 아직 어른이 되기엔 멀었다. 기대감이 성취감으로 바뀌는 그 순간을 경험하고 싶다. 행여 무지개를 보지 못하더라도, 무지개를 볼 수 있음을 믿고 싶다.


그러고 보니 이런 마음 또한 기대감이군. 역시, 기대감이 나를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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