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지만 확실한 계획

by 조혜영


새해가 시작되고 보름이 지났다. 매번 새해가 되면 원대한 계획을 세우곤 했는데, 예를 들면 새벽 5시에 일어나 요가와 명상하기, 소설 쓰기, 막힘없을 만큼 영어회화 연습하기, 몸무게 5Kg 줄이기 같은 것들이다. 이런 계획들이 내게 원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 쓰지 않으면 다음 달로 이월되는 휴대폰 데이터 상품처럼 나의 계획들도 늘 그다음 해로 이월되곤 했다.


한 해 한 해 이런 습관이 반복되면서 적립금처럼 쌓인 것이 있었다. 바로 좌절감. 누군가 ‘의지박약, 게으름, 노력 부족’이라 세긴 커다란 도장을 내 등짝에 찍어놓은 느낌... 스스로를 한심한 인간으로 규정하는 낙인은 샤워를 하고 이태리타월로 때를 빡빡 밀어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올해는 계획 같은 걸 세우지 않기로 했다. ‘글쓰기를 즐기자!’는 바람 정도만 가졌을 뿐.


사실 새해 초 우리의 계획이 작심삼일로 끝나게 되는 뜻밖의 이유는 편도체 때문이라고 한다. 중뇌에 위치한 편도체는 변화를 싫어하는데, 그것이 긍정적인 변화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편도체는 방어 반응을 통제하는 일종의 경고 체계로 인류의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편도체는 모든 포유류가 공유하는 기관인데, 중대한 위험에 맞닥뜨릴 때 우리 신체가 즉각적인 행동에 돌입하도록 경고를 보낸다.

- <아주 작은 반복의 힘>, 로버트 마우어, 스몰빅라이프, p.35


위험에 경고를 보냄으로써 인류의 생존을 지켜온 편도체에겐 긍정적인 변화 또한 낯설고 위험한 상황일 뿐이다. 그러니 매일 늦잠을 자던 내가 갑자기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상황은 편도체에겐 위험이다. 새벽 5시 요란하게 알람이 울리면, 편도체가 내게 속삭인다. 일어나지 마... 늘 하던 대로 더 자... 지금 일어나는 건 위험해... 착한(?) 나는 언제나 편도체 편이다. 편도체의 말이라면 아주 잘 듣는다.


<아주 작은 반복의 힘>의 저자 로버트 마우어는 편도체를 속이는 것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편도체를 속이려면 갑작스러운 변화보다는 작은 변화가 제격이다. 살을 빼려고 운동을 결심했다면, 러닝머신 위에 1분만 서 있다가 내려오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소설을 쓰고 싶다면, 하루에 문장 3줄을 쓰기로 계획하는 것도 방법이다.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코웃음이 나왔다. 러닝머신 위에 1분만 서 있다 내려오라고? 하루에 3 문장만 쓰라고? 하지만 이런 계획은 실천하기가 너무도 쉽고, 이런 실천을 반복하다 보면 내가 느꼈던 좌절감이 아닌 자신감이 쌓여간다고 한다. 그러다 어떤 날, 러닝머신 위에서 10분을 뛰고 하루에 소설 한 페이지라도 쓰게 되는 날에는 계획보다 더 많이 실천한 것인 만큼 성취감도 뒤따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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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가 잘 되지 않을 때, 실제로 하루 3 문장만 써본 적이 있었다. 3줄의 문장 쓰고 난 후 떠오른 생각은 '아, 오늘은 계획대로 했어.' 별 거 아닌 데도 왠지 하루가 뿌듯했다. 내일도 다시 3 문장을 썼다. '오늘도 계획을 이뤘네. 좋아. 잘했어.' 이런 기분이 드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몇 문장을 더 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날 나는 A4 1장을 썼다.


A4 3장을 써야겠다고 계획을 세웠을 때는 가슴이 답답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뭔가 마음이 조급했다. 물론 1장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포기했다. 그런데, 3 문장만 써야지 하고 마음을 먹으니 긴장이 풀리면서 편안해졌다. 편안한 마음이 되니 글이 술술 써졌다. 똑같은 1장을 썼지만, 쓰고 난 후의 마음 상태는 확연한 차이가 났다. 좌절감이냐, 성취감이냐? 자신에게 실망하느냐, 만족하느냐?


마지막으로 며칠 전 신문에서 읽었던 오은 시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얼마 전에 김현 시인을 만났다. 그는 매해 새해 계획을 세우곤 하는데, 작년의 계획을 듣는 순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늦게 잠을 더 자주 자고, 야식을 종종 먹고, 줄넘기를 하다 중도에 포기하고, 마감 같은 거 일주일씩은 늦을 것, 짝꿍에게는 더 징징대고 인간관계는 더 복잡해질 것. 그러니까 마음을 다해 대충 살 것." 그리고 그는 작년 계획의 상당수를 달성했다고 했다.




올해 나의 계획은 이걸로 정했다. 마음을 다해 대충 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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