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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영 Jan 21. 2019

내가 만든 두 개의 세계



돌이켜보면 내 안에는 늘 두 개의 세계가 있었다. 나를 둘러싼 세계와 그들을 둘러싼 세계. 좀 더 간단히 말하면, 내 편과 네 편. 초등학교 시절, 짝꿍과 함께 쓰던 책상에서 서로의 경계를 구분하고자 책상 가운데 연필로 선을 그었던 것처럼 내 의식 안에도 굵은 선이 하나 있었다. 

   

어느 철학자는 말했었다. 타인과의 구별 짓기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지만 나의 구별 짓기는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가 동등한 가치를 지닌 차이로써의 구별 짓기가 아니었다. 나의 세계보다는 너의 세계를 탐했고, 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너의 세계를 폄하했었다. 


책상 가운데 선의 바깥쪽엔 돈 많은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 예쁘고 잘 생긴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 당당하고 잘난 사람들... 이 있었다. 의식 안에 보이지 않는 선은 사회생활을 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굵어졌다. 급기야 그 선은 이제 눈으로도 확연히 보일 듯한 굵은 철못이 되어 내 심장의 중앙을 관통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그들의 약점과 한계를 들춰내 건강한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마음껏 비웃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들을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분리감이 두려움을 만들어냈다. 스스로 자신을 약자, 못 가진 자, 못난 자의 선 안에 가둠으로써 반대쪽에 서 있는 자에게 더 큰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다. 살아온 배경과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각자의 삶은 이분법의 세계 안에서 정당하게 구분되어질 수 있다. 다만 내가 놓쳤던 것은 스스로의 세계를 평가절하시켰다는 것.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는 것이 요즘 내 삶의 화두다. 그래서 나는 내 의식 안의 굵은 선을 지우려 한다. 선을 지운다는 것은 두루뭉술해진다는 것이 아니다. 평가절하 시켰던 나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두려움에 떠는 작은 하나가 아닌, 두려움을 넘어서는 더 큰 하나를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선을 지운다는 것은 결국 내면의 갈등과 부조화를 내려놓고, 조화로운 삶을 선택하겠다는 결정이다. 

  


'행복해진다는 것'이라는 시에서 헤르만 헤세는 말한다. "누구나 행복에 이르지. 스스로 행복하고 마음속에서 조화를 찾는 한..." 그전에는 마음속에서 조화를 찾는다는 게 뭔지 구체적으로 느끼지 못했었다. 그저 '조화'는 좋은 말이니까, '조화를 찾으면 행복해지겠지'하고 막연히 생각했었던 것 같다. 헤세는 위 구절에 연이어 덧붙인다. "그러니까 사랑을 하는 한..." 


결국 조화로움이란 내 안에 사랑을 회복하는 일인가 보다. 나의 세계, 너의 세계를 구획 짓지 말고, 구획 지음으로써 옳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우월을 가리지 말고, 가능하면 내가 만나는 모든 세계를 사랑으로 바라보려는 시선 말이다. 


물론 쉽지 않다. 앞으로도 내 의식은 습관처럼 끊임없이 두 개의 세계를 만들어낼 것이다. 외줄 타는 사람이 흔들리는 몸에 균형을 잡으며 한발 한발 내딛듯이 부조화의 흔들림 속에서 조화를 찾아내는 일이 어렵지만 더 값진 일인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조차 알지 못하는 사이, 나로 인해 선 밖에 머물러야 했던 이들에게 화해의 악수를 신청한다. 나의 마음 안에서 그들이 내가 내민 손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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