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를 통해 알게 된 나의 작동 방식
육상 근무를 하며 자취하던 시절, 나는 청소를 미루는 스스로의 모습을 싫어했다.
청소를 잘하는 사람은 성실한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게으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질러진 방을 보며 ‘청소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들었지만, 막상 몸이 움직이지 않는 나를 보며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청결을 무시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집에 냄새가 나거나 기본적인 위생이 무너지는 건
허용하지 않았다.
다만, 어질러진 물건들을 하나하나 제자리에 돌려놓는 일에는 늘 같은 질문이 따라왔다.
'이만한 에너지를 써서 얻는 결과가 과연 나에게 필요한 수준일까?'
말끔해진 공간이 주는 기분 좋은 감정은 분명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반복해야 하는 과정은 나에게는 썩 효율적인 선택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청소는 늘 ‘해야 하는 일’로 남았고, 우선순위에서는 자주 밀려났다.
그러다 동생과 함께 살게 되면서 생활은 조금 달라졌다.
혼자 살 때는 미뤄두던 청소를, 이상하게도 그때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하게 됐다.
방이 더러워지는 게 싫어서라기보다, 함께 쓰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이미 몸이 먼저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내가 청소를 못 하는 사람이 아니라 청소를 할 이유가 분명할 때 움직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상황이 바뀌자 행동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꽤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행동을 고치려 들기보다 그 행동이 나오지 않던 이유를 먼저 생각하게 됐다.
청소를 미루는 나를 문제 삼기보다, 상황과 행동을 연결하는 방식, 즉 나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나는 스스로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신 의미가 분명한 일에는 굳이 나를 몰아붙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였다.
즉, 나는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의미가 어느 정도로 있느냐에 따라 적극성이 달라졌을 뿐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 일들을
모두 외면하며 살 지는 않았다. 동생과의 관계를 떠올리며 청소를 했던 것처럼, 스스로 의미를 느끼지 못하지만 상대방과의 관계가 달린 일이라면, 그것 만으로도 나를 행동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었다.
그렇게 이때까지의 발자취를 떠올리니 나를 행동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을 알 수 있게 되었고, 나만의 방식을 확립하게 되었다.
의미가 생기지 않지만 해야 하는 것에는 다른 동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구조를 바꾸는 방식이다.
이제 나는 청소를 미루는 나를 더 이상 싫어하지 않는다.
그 모습이 나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 동기가 연결될 때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나를 설득하려 들기보다 나를 움직이게 할 시스템을 만든다.
의미가 생기지 않는 행동에도 다른 이유가 자연스럽게 붙도록, 내 삶의 구조를 조금씩 조정해 나간다.
그 덕분에 나는 마음에 들지 않던 나의 모습도
더 이상 밀어내지 않게 되었고,
나를 조금 더 잘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