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게

2025 회고록

by 채윤희

약 3년 간 인생이 바닥을 치면서 끄나풀 같은 희망의 끈을 동여매며 회생하려 애썼다. 25년을 마무리한 지금의 나는 더이상 애쓰지 않아도 된다. 희망을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희망이 온다.


회복의 시작은 마포구로 이사를 오는 것부터였다. 사기 당한 전셋집을 보고 있노라니 2n년을 살아 왔던 강서구에 발끝만 닿아도 토악질이 났다. 그동안 그렇게 살기 좋은 강서라며 보는 사람마다 강서구 사랑을 전파했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징글징글한 동네가 될 줄이야. 별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내더라도 그 끝이 사기당한 집에서 잠드는 것이라면 아무렇지 않았던 날들도 끔찍한 날들이 되곤 했다. 불을 끄면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푹 가라앉았고 가라앉은 이유를 찾으려 의미 없이 휴대 전화를 스크롤하다 밤을 새우고. 퀭한 아침을 맞는 날들의 반복. 나는 그게 나를 망친다 생각했다. 마포구로의 이사는 나를 괴롭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지내는 것의 첫걸음이었다.


누군가 그 동네에 살아서 뭐가 좋느냐 물으면 맛집이 많다, 볼거리가 많다 등을 이야기하겠지만, 최근 그 안의 본질을 깨달았다.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은 나의 취향이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온다는 점이다.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공간을 찾아 나서기까지 소요됐던 준비 시간, 막상 오고 나니 실망하게 되는 경험,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내게 없다. 꼬질꼬질하게 동네 산책을 나갔다 귀여운 사진관이 새로 문을 연 것을 발견하고, 즉흥으로 사진을 찍고,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후미진 골목에서 내 마음에 쏙 드는 노포를 발견하고. 맛이 별로였어도 애써 찾아온 것 아니니 실망할 이유 없고. 이 일상이 매주 반복되는 삶. 쭉 좋아하는 동네에 살아야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매순간 한다. 이 다짐은 자연스러움을 가장 높은 미학적 가치로 치는 나에게 앞으로 다신 잃고 싶지 않은 약속이다.


주거 환경에서 나의 자연스러움을 찾았더니 그동안 묵시하던 자연스럽지 않은 내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당시 회사는 성과 부진을 핑계로 여러 불이익을 일방적으로 통지하며 구성원을 통제했는데, 누군가의 통제 하에 묵언하며 남아 있는 내 모습이 문득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다들 참으면서 사는 것 같길래 최대한으로 참아 봤는데, 굳이 이렇게 살 필요 있나? 무엇 때문에 남들 말에 휘둘리며 내 행복을 온몸으로 막으며 살아야 할까. 플래그가 서자마자 다음날 바로 퇴사 면담을 잡았고, 일주일 뒤 퇴사했다. 막상 퇴사를 한 뒤에는 불안이 나를 집어삼켰으나, 반년 뒤 보란듯이 내가 자연스러울 수 있는 회사에 입사했다.


생각해 보면 전 회사에 입사를 결정했던 이유도 나라는 사람이 구김 없이 쓰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는데, 이번에도 나는 같은 결정을 했다. 끝이 어땠든 자연스러움은 나에게 정말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확인했다. 자연스러울 수 있는 곳을 자연스럽게 선택하고 있던 걸 보면 나는 자연히 그런 사람이다. 현 직장은 나에게 일종의 도전이었는데, 면접 때부터 입사한 지 3개월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매일 도전을 하고 있다. 잊고 살던 감각이 깨어나는 기분이다. 나는 언제나 구성원 중 사람을 케어하고 유일하게 팀을 챙기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이 조직은 나보다 두세 발은 먼저 사람들을 챙기고 있어서, 내가 비교적 건조한 사람이 된다. 이 기분이 낯설면서도 재미있다.


이번 한 해가 안정적일 수 있었던 또 하나의 큰 이유는 아마 나의 애인일 것이다. 나는 나의 존재 가치를 연애 감정에서 찾는 고약한 취미가 있었는데, 그를 만나고 악취미를 청산했다. 그동안 만나 왔던 사람들은 나의 어느 한 부분을 사랑했다. 나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말하는 사람도 사실은 나의 특정 모습을 사랑한다는 것을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 모습을 유지하려 애썼고, 그게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진정으로 나의 전체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나니 모든 나의 사랑이 부자연스러웠음을 깨달았다. 이 사실이 나를 자유롭게 했고 쓸모없는 불안과 걱정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내가 나일 수 있는 부동의 인물은, 나에게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내가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한다. 차분하게.


감정이 가파르던 사람이 잔잔해지면 한 가지 문제가 생기는데, 생각이 간결해지면서 사유의 폭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확실히 25년에는 무언가를 깊게 고찰하거나 한 가지 감정에 빠져 지내지 않았다. 때문에 글을 쓴다거나 감상을 적는 일들도 적었지. 26년에는 이 점을 의식적으로 떠올리며 의식적 사유를 해 보려 한다. 26년의 소망이 있다면 그동안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 한 가지를 깨닫고, 깊이 파고들고 싶다.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겠지만.


김밥을 잘 말고 싶고 알리오올리오를 마스터하고 싶던 25년 초의 나는, 파스타를 마스터하고 김밥은 여전히 못 싸는 내가 됐다. 뭐 하나가 성공하면 뭐 하나는 안 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작더라도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있는 것이다. 올해는 작년보다 하고 싶은 게 많다. 이 사실이, 내가 자생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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