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12
이치코상에게
오랜만이야. 오랫동안 쓰지 못한 이유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쾌락과 심란함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네. 신나게 놀았어. 매일 밤 술을 마시고 우버를 타고 집에 돌아왔고, 해가 뜨면 지긋지긋한 심란함에 시달리며 출근길 기차를 탔어. 숙취가 달아나지도 않은 채 술을 들이붓던 옛날이 떠올라. 숙취와 만취의 디졸브. 이치코상과 나는 그해 여름에 참 철이 없었고, 재밌었지. 뉴욕에 도착하고 겁쟁이처럼 살았던 걸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야.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건 곧 총에 맞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석 달이 흐르고 나니, 그 경각심에도 익숙해지더라고. 그리고 혼자가 아니기도 하고.
나는 브루클린과 사랑에 빠졌어. 퇴근하고 가는 평일 저녁의 Greenpoint. 해가 쨍한, 동네 주민과 관광객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인파 속 Brooklyn Flea market. 친구 작업실로 파자마 입고 놀러 간 Movie night in Williamsburg도. 모든 지점이 좋았어. 뉴욕에 온 이방인의 첫걸음을 환영하며 사람을 현혹하는 맨해튼도 좋지만, 브루클린은 내가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는, 편하고 자유로운 곳이라 더 좋아.
특히 퇴근 후 친구와 술 한잔 하러간 브루클린의 동네 바 Rocka Rolla는 이 쾌락 주간의 시작이었지. 시끌벅적한 코너에 위치한 이곳은 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이야. 입구에선 거구의 사내가 ID 체크를 하고, 커다란 노랫소리(당연히 Rock)를 민망하게 할 정도의 신이 난 손님들의 수다, 군데군데 붙어 있는 전설적인 록스타의 사진들, 온 전신에 붙어있는 인디 밴드들의 스티커, 그리고 고장이 난 주크박스까지. 영화 세트장에 들어온 기분이었어. 그리고 야외 테라스에는 항아리만 한 재떨이도 마련되어 있었다구! 우리는 데킬라 샷, 생맥주, 대접에 담겨오는 칵테일까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셨어. 노래가 바뀔 때마다 반응하며 음악 이야기를 하고, 친구가 만들고 있는 노래의 가사 이야기를 하고, 내가 이치코상에게 쓰는 편지 이야기를 했어. 친구도 이치코상이 궁금하대. 나는 다음번에 소개해 주겠다고 약속했어. 같이 어울리면 재밌을 거야. 음악을 좋아하는 이치코상과 아주 잘 맞을 것 같아.
술기운이 잔뜩 묻은 발걸음으로 Greenpoint 동네를 걸었어. 신나게 대화하며 걷는데, 나는 갑자기 멈춰 섰어. 그리고 뒤를 돌았어. 우리가 걸어왔던 거리를 다시 보고 싶었어. 원래는 카메라부터 켜기 마련인데, 그날은 왠지 그냥 눈에 담고 싶었어.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냄새를 맡았어. 그거 알아 이치코상? 시각적 회상을 하기 위한 트리거는 보통 후각적 단서라는 거. 이치코상이 입던 옷을 입으면 이치코상의 냄새가 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치코상과 함께 있었던 장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반대도 가능하구. 그래서 난 그 거리의 냄새를 들이켰던 거야. 언젠가 어디선가 비슷한 향기가 나면, 이 거리를 떠올릴 수 있게 될 테니까.
다음 날은 Manhattan downtown에 있는 Christopher street에 갔어. 구글맵에는 성소수자 명소 거리라고 뜨는데, 그때 딱 기억이 나더라. 내가 여기가 익숙했던 이유. 내 인생의 작가들, Beat generation을 좋아하기 시작한 영화 <Kill Your Darlings>에 나오거든. 영화에서 앨런이 루시엔과 처음 놀러 나가는 장면에서, 1940년대 뉴욕 지하철 노선도 컷이 나오는데, 그들이 내리는 곳이 바로 Christopher street이거든. 원래는 재즈 클럽을 가려 했는데, 그냥 떠돌다 동네 Dive bar를 갔어. 1층에는 피아노맨이 신나게 Billy Joel의 Piano man을 부르고 있었고, 2층으로 올라가니 퀴어들의 가라오케가 있었어. 화려한 차림의 언니가 사회를 보고, 커플들이 손을 잡고 수줍게 노래를 불렀어. 난 구석에 서서 그들의 파티를 즐겼어. David Bowie - I’m afraid of Americans 뮤직비디오에 이 거리가 나와. 물론 내가 경험한 아름다움을 중심으로 연출된 비디오는 아니지만, 그냥 내가 이 노래를 좋아해서 알려주는 것이기도 해.
이치코상과 함께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싶어. 얼마 전에 친구와 함께 추가할 수 있는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는데, 이게 생각보다 꽤 재밌더라고. 친구와 자주 그런 이야기를 했어. “음악이, 악기가, 내 말을 대신 해주고 있는 것 같아. 가사가 아니더라도.” 난 이렇게 요즘 메세지창보다 플레이리스트로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대화를 해. 물론 3시간의 통근 때문에 노래를 엄청나게 많이 듣기도 하고. 음악 취향과 장르는 상관없어. 오직 느낌과 소통만이 존재하는 곳이야.
쾌락은 이 정도면 됐고, 음… 심란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사실 하기 싫어. 못하겠고. 누구나 갖고 있는 그런 흔한 심란함의 종류라고 생각해 줘. 어떤 고민은 문장으로 써내는 순간 사실이 돼. 그게 무서워. 한편으론, 어떤 고통은 고뇌가 되지 못하고 사그라들기도 하고. 이걸 기대할래. 내 나이의 체력으로 이 정도 고통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말 못 해줘서 미안해. 그치만 나도, 이치코상도 알잖아. 이치코상도 내게 말하지 않는 것들이 한가득이란 걸.
그래도 너무 쌓아두면 몸이 무거워져. 힘듦은 물리적 진상이 되기도 하니까. 곧 여름휴가 때 비키니를 입어야 해서 살이 찌면 안 돼. 얼른 훌훌 털어내야지, 우리.
잠은 잘자 당연히. 자기 직전까지 놀다가 집에 들어오니까. 잠이 내 인생에 별문제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고 행복해. 이치코상의 숙면을 온전히, 진심으로 바랄게. 응원할게.
안녕. 또 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