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편지

20230609

by 채리 김

이치코상에게


안녕. 죽어 버려도 괜찮을 만큼, 나는 괜찮아. 뉴욕에 온 지 반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건 우습게도 동네도, 일도 아닌, 사람이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대화를 나누고, 새로운 술집에 가고, 새로운 영화를 봐. 그리고 영화만이 부작용 없이 나를 채워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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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브롱크스를 자주 갔었어. 동물원도 가고, 밤 드라이브도 갔었지. 차가 막히는 퀸스 고속도로를 지나, 맨해튼 도심을 뒤로하고 계속 달리다 보면 조용하고 어두운 숲길이 나와. 몇 번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우리는 그냥 달렸고, 여기 해변은 아주 지저분하다고 이야기하며, 노래를 들었어. 하드록을 자주 들어. 남의 절규를 들으면 내 아우성은 좀 가볍게 느껴지거든. 그렇게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깜깜한 도로를 지나면, 갑자기 해산물 식당 거리가 나와. 거기는 브롱크스 연안 부두 같은 곳이었어. 빨간색의 간판, 랍스터 식당들, 행인은 없고 레스토랑 안에서 식사하는 가족들이 보여. 간간이 스트립 클럽이 있고, 바이크 타는 커플이 싸우는 주유소가 있어. 당장 강도가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주유소 매점. 친구가 차에 기름을 넣는 동안 물을 사러 들어갔는데, 마치 내가 스파이더맨이 된 기분이 들었어. 어쨌든 아주 묘한 분위기였어. 딱히 ‘묘함’을 표상하고 있지는 않은데, 온전히 또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었달까. 목적지인 동네 바에 도착했어. 카운터 뒤로 먼지 쌓인 맥주 상자들을 지나고 삐걱거리는 낡은 문을 열면 창고가 나와. 딱 내가 상상하던 개러지밴드의 아지트 그 자체였어. 암실에서 켜두는 것 같은 빨간 조명과 굴러다니는 드럼 스틱, 대마초 재떨이, 다 떨어져 너덜거리는 방음벽. 친구의 기타를 돌려주고, 얼마 멀지 않은 부둣가로 갔어. 이게 강인 건지, 바다인 건지 한참을 토론하고, 주차장 출구를 막은 채 세워둔 차를 급하게 빼고, 그 와중에 소방차가 오고, 괜히 양심에 찔린 나는 담배를 지져 껐어. 저 너머 육지가 보이는데, 나는 그게 코네티컷이라며 우겼지. 브롱크스는 맨해튼 위에 있고 여기서 바라볼 수 있는 건 뉴저지 아니면 코네티컷이라고 생각했거든. 웃기게도 롱아일랜드였지만. 완전히 반대로 서 있었더라고. 건너편 저 멀리에서 초록색 등대 불빛이 반짝여. 우리는 위대한 개츠비가 된 것 같다며 웃어. 나는 참으로 비극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라며 감탄하고, 친구는 피츠제럴드와 함께 T.S 엘리엇도 읽었어야 했다며, 하이스쿨 시절 고통의 기억을 불러일으키지 말라며 불평해. 뉴욕은 벌써 여름이 왔다고 생각한 탓에 얇게 입었는데, 물가는 너무 추웠어. 소방차가 철수하자마자 난 코를 훌쩍이며 또 다음 담배를 피웠어. 그리고 심심하고 울적하게 다시 브루클린으로 돌아왔지. 그래도 나는 브롱크스에서 퀸스를 지나 이름 모를 다리를 건너 브루클린으로 가는 그 길을 참 좋아해. 한낮의 소풍 같기도 하고, 밤중의 드라이브 같기도 해.


음. 그리고 나는 요즘 글을 잘 못써. 나는 잘 쓰길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살길 원하는 사람이었나? 우린 왜 이렇게 미련하리만큼 잘 살고 싶어 할까. 잘 산다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마냥 행복하고 싶어 하는 이 멍청하고 순박한 소망이 난 미워.


편지가 늦어서 미안해.

곧 또 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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