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편지

20230702

by 채리 김

이치코상에게


오늘은 포킵시에서 쓴 내 일기를 보낼게.


난파된 보트에 올라가 술래잡기하는 아이들, 각자만의 사정을 챙겨서 기차에 올라탄 승객들, 적당히 낡은 색의 열차 칸 내부, 페소아의 책은 베개가 되고 네가 만들어 준 플레이리스트를 듣는다. 빗물의 허드슨강과 라디오 헤드는 잘 어울린다. 강의 길을 따라 기울어진 전봇대와 문득 끊어진 전신줄. 거꾸로 항해하는 과적 선박. 고전풍의 기차역에 도착하니 모든 소리가 울리고 비가 내리다 만 습한 하늘이 날 반긴다. 예쁜 청바지를 입은 커플이 포옹하고 나는 자꾸 목이 마른 지 헛기침한다. 아주 멋있는 보라색 스포츠카를 발견했지만, 어딘가 이 시골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생소함을 함께 느끼고 어긋난 쾌락의 도시를 벗어난다. 모든 것이 낡고 오래된 이곳에서 평화를 선물 받을 거란 희망을 품는다. 시가 냄새가 나는 택시에 타며 이마를 찧고 기사 할아버지는 웃는다. 키득대는 동행은 여행의 시작이다. 나는 창문을 내려 바람을 쐬며 기사에게 말한다.


비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여긴 씻겨 내려갈 지저분함이 뉴욕보다 덜 하죠.

여기도 뉴욕 아닌가요.

그 “뉴욕”이 아닌 거 알잖아요.


아트 센터가 있는 작은 칼리지로 간다. 쨍한 오후의 햇빛이 묻은 풀잎들이 예쁘다. 성곽 뒤 숨겨진 연못이 있다.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출입구를 찾는다. 온실을 지나, 차가 한 대도 없는 주차장을 지나, 잘못 들어온 길을 다시 돌아 걸으면 입구가 나온다. 이미 지나온 채플이 궁금해진다. 여긴 온통 숲 냄새가 난다. 짓뭉개진 얼굴들과 디테일한 풍경화. 엉키고 엉킨 무릎들과 산처럼 쌓인 초록 캔디. 자꾸 딸꾹질하는 관객, 재채기로 대답하는 나. 낸 골든과 메이플소프의 작품 앞에서 벅차오르고 90년대 뉴욕 에이즈 시위 다큐멘터리에 몰두한다. 한없이 개인적인 이야기만 쓰고 있는 내가 과연 세상을 향해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한다. 뮤지엄 구석에 주저앉아 팸플렛에 연필로 일기를 쓴다. 나는 여전히 내가 제일 중요한 나 자신이 밉다. 어젯밤의 기억만 계속 돌려보는 내가 부끄럽다. 나는 너를 위해 안간힘을 다 쓰지만 예술을 위해선 노력하지 않는다. 통신이 자꾸 끊기는 이곳에서 마침내 안정을 찾는다.


숙소는 나름 번화가에 있었다. 체크인하려는데 건너편 노숙자가 자기에게로 오라며 소리쳤다. 가볍게 무시했지만, 문이 잘 열리지 않자, 내 마음은 급해졌다. 그러고는 숙소 밖을 나가는 게 쉽지 않아 졌다. 저녁을 사러 내려간 자메이카 식당 앞에선 팔이 하나 없는 사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건너편에선 남녀가 언성을 높여 싸우고 있었다. 자메이칸 생선 요리는 아주 맛있었지만, 식사 후 담배를 피우러 아래층으로 내려가자니 조금 겁이 났다. 창밖에선 힙합 노래를 크게 튼 차들이 지나간다. 위층에선 무언가를 끄는 듯한 소리가 계속 들리고, 나는 여기 침대에 누워 책을 읽을 뿐이다.


덜 마신 맥주와 인터미션 간 담배를 피우며 급하게 마신 로제 와인. 소화불량적 술기운은 에이미 만의 첫 곡을 더 감동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아주 마른 몸의 그녀는 기타를 메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노래를 부른다. 내가 어떤 남자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난 하나도 그를 모르고 있었다는 내용의 노래. 관객석 앉아 있는 나를 찌르는 그 첫 곡. 블랙 가죽 재킷, 스카프, 미니 청스커트, 망사 스타킹 모든 게 그녀의 스타일을 만든다. 결국은 그녀의 목소리다. 그녀 옆의 귀여운 기타리스트. 유광 일렉 기타에 반사되는 무대 조명.


앙코르 공연까지 끝이 나자 모두 일어서 박수를 친다. 관객들은 모두 이 동네 사람들이다. 공연장 내부 안내인들 모두 지긋한 노인이다. 늦은 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스모크샵에 들렸다. 캘리포니아 아티스트가 커스텀한 에어포스원을 사고, 맥주를 사서 들어가기 위해 가게의 위치를 묻는다. 동공이 아주 크게 확장된, 약에 취한 점원이 자신이 차로 태워주겠다고 말한다. 나는 그저 그의 눈알을 응시할 뿐으로 대꾸했다.


뒤늦게 맨해튼에서 기차를 타고 온 친구가 합류했다. 우리는 데운 팟타이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떤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영원히 결핍에 시달리며 살 것이란 비참하고도 로맨틱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곧 있을 내 생일을 위해 화끈한 클럽에 가자며 깔깔 웃는다. 잠시간 도시에서 벗어난 기분을 만끽하지만, 우리는 곧 피로한 그 도시를 그리워한다. 북유럽풍 인테리어와 컨트리풍 소품들이 부조화한 조화를 이루는 숙소에서 우린 늦은 잠에 든다. 8시간도 머무르지 않을 이곳에 소형 캐리어를 가져온 친구는 막상 파자마 바지는 챙겨 오지 않아 청바지를 입고 잠에 든다. 나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에이미 만의 목소리와 너를 함께 그린다. 옆 건물에선 자메이칸 클럽 뮤직이 시끄럽게 틀어진 파티가 한창이다. 술 취한 자들의 고함을 들으며 부산스러운 잠을 청한다.


포킵시는 나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 뉴욕도 마찬가지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슬프게도) 아무런 악의가 없다. 나를 거쳐 간 수많은 사람을 떠올린다. 나를 거쳐 간 수많은 장소들을 세어본다. 분명 내가 거쳐 간 것들이지만, 이상하게 그것들이 나를 통과해 간 기분이다. 모닝 블랙커피로 쓰린 속을 달랜다. 여행을 오면 문장들이 내 말동무가 되어준다. 외롭지 않다. 뉴욕으로 돌아가면 문장은 다시 자취를 감추고 나는 쉽게 외로워질 것이다.


“한 소절의 음악이나 한 자락의 꿈, 뭐라도 좋으니 내가 느끼게 해 줬으면, 내가 생각에 빠지지 않게 해 줬으면.”

페소아의 책을 가져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일기는 곧 나의 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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