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편지

20230801

by 채리 김

이치코상에게

우리는 다소 게을러서 오후 느지막이 외출을 했어. 이른 퇴근 후 낮잠을 자고, 찌는 더위가 볕이 좋은 오후라고 생각이 바뀔 때쯤에 오늘 하루의 계획을 짜기 시작했지.


첫 번째. 늦었지만, 코니아일랜드에 가서 해변을 걷고, 놀이공원을 구경하고, 핫도그를 먹고 돌아온다.

원래 코니아일랜드 수족관에 가려 했거든. 그렇지만 이미 시간은 4시고, 그린포인트부터 코니아일랜드는 브루클린의 끝과 끝이어서, 차로 가는 데만 해도 1시간이었어. 수족관은 6시에 폐장해. 그렇다면 해변만 걷는 것은? 요즘 뉴욕은 8시가 넘도록 해가 지지 않아. 낮이 아주 길어졌어. 그 말인즉슨, 여전히 해변은 숨이 막히도록 더울 것이라는 거지. 우린 그냥 다음 주에 아침 일찍 코니아일랜드에 가기로 약속했어, 수족관에 갈 수 있게.


두 번째.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바 호핑(다이브 바를 옮겨 다니며 술을 마시는 것, 보통 우린 3차까지 마셔.)을 한다.

우선 뉴욕 사람들은 금요일 저녁이 되면 모두 극장으로 모이기로 약속이라도 한 건지, 적당한 시간대에 티켓은 다 매진이었어. 예매 직전에 좌석을 빼앗길 지경이었으니, 성질이 잔뜩 난 나는 영화는 보고 싶지 않았어. 그렇지만 술을 마시는 건 좋으니 고려해 볼 만한 선택지였지.


세 번째. 우리의 최종 선택. 루스벨트 아일랜드에 가서 등대를 보고, 브루클린으로 돌아와 술을 마신다.

맨해튼과 퀸스 가운데 위치한 길쭉하고 얇은 루스벨트 아일랜드는 맨해튼 이스트가에서 트램을 타면 스키 곤돌라를 타듯 고공으로 섬에 입장할 수 있어. 나는 섬 북쪽 끝자락에 있는 등대가 마음에 들었어. 전혀 계획에 없던 선택지였지만, 언제나 우리의 외출은 충동적이었기에 낯선 결정은 아니었어. 우리는 차를 몰고 맨해튼으로 갔지. (물론 퀸스보로 다리에서 30분 동안 멈춰있어야 했던 교통체증은 잊고 싶어) 맨해튼 시내에서 주차 자리를 찾아내는 몹시 어려운 미션을 겨우 성공해 내고, 트램을 타러 갔지. 트램 안은 건식 사우나 같았어. 덥고 끈적했지. 그렇지만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스트 거리 풍경은 나쁘지 않았어.



섬에 도착하니 그때부터 여긴 다른 세상이었어. 어찌 보면 맨해튼과 퀸스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뉴욕 한가운데 위치한 곳인데, 전혀 뉴욕 같지 않았달까. 조용하고 깨끗했어. 모형 같은 신축 건물에, 장난감 같은 표지판, 도시 소음으로부터 안전한, 가로 폭이 얇은 섬이다 보니 양쪽에서 불어오는 강가 바람의 냄새까지. 요즘 나는 그 무엇에도 잘 감탄하지 않는 컨디션으로 살고 있어서 몹시 놀라진 않았지만, 그래도 흥미로웠어. 음. 영화 <가위손>에 나오는 마을 같았달까. 우리는 일단 맨해튼 쪽, 즉 섬의 서쪽 강가로 가서 걸었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냥 별 합의 없이 걸었어. 건너편에서 가끔 사이렌 소리가 들렸지만, 두통이 생기던 맨해튼 중심부에서의 고통과는 달랐지. 햇볕은 여전히 뜨거웠어. 우린 얼음물을 담아 온 스프레이를 꺼냈지. 몸에 차가운 물을 뿌려 더위를 식히려 챙겨 갔거든. 효과는 좋았어. 한결 시원해졌지. 그러다 나는 섬의 중앙에서 걷고 싶었어. 다람쥐가 있는 풀밭을 지나, (우리의 대화 참고 : 그나저나 이 다람쥐는 이 섬에 어떻게 들어왔을까? / 수영해서 왔겠지 / 왠지 강한 다람쥐 같더라) 우스꽝스러운 굴뚝을 몇 개 지나면, 이 마을의 중심 거리가 나와. 재밌는 건 거리 하나가 이 섬의 중심 뼈대라는 사실이야. 이게 다고. 그만큼 섬의 폭은 좁아. 그렇게 거리를 걷다 보면, 이 고립된 섬에 누가 사는지 알 수 있더라고. 주로 돈이 많아 보이는 가족 단위,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이 살아. 젊은이들은 잘 보이지 않아. 그들은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어. 10분이면 한 바퀴를 도는 버스가 정차하는 정류장,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수다를 떠는 노인들. 자주 지나가는 유모차, 작은 농구 코트에서 운동하는 아이들. 낮은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소박한 정원. 나는 섬의 왼쪽으로도 가봐. 친구는 계속 나의 앞길에 물을 뿌려줘. 시원해. 북쪽 퀸스, 아스토리아에는 공장이 좀 있고, 배들이 지나가고, 뜬금없이 카누를 타는 무리가 보여.



그렇게 좌우로 섬의 양 끝을 오가며 30분쯤 걷다 보면 북쪽 등대에 도착해. 트램은 섬의 남쪽에 있었는데, 끝에서 끝까지 걸어서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니. 이곳은 섬이라는 단어보다 동네 혹은 마을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해. 등대는 작고 귀여웠어. 낚시를 하는 사람이 있었고, 커다란 얼굴 마스크 조각상들이 하늘 높이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지. 담배를 피우고, 무릎 높이의 낮은 방파벽 너머로 몸을 기울여 강물에 손도 대어보고, 당연히 기념사진도 남기고. 끈적한 피로감은 더운 바람에 식어가고, 몇십 마리의 거위 무리를 지켜보며, 우린 우리 나름의 여유를 즐겼어. 여행에 온 기분은 아니었지만, 잠시간 도시로부터 벗어난 기분을 만끽했지.


그리고 맨해튼으로 돌아와 주차해 둔 길가를 찾느라 한참을 헤맸고, 브루클린 동네 바에서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셨어. 한껏 취한 채로 영감을 받은 건지 뭔지,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각자의 작업을 했어. 음악을 만들고 글을 썼지. 80센트 기타 줄, 폰 케이스 뒤에 끼워 둔 주차 티켓, 먹다 남은 스시, 반항적인 기타 리프, 이 집을 장악한 고양이, 해맑은 표정, 그리고 메트로놈 소리.

이치코상. 나는 곧 이사를 하고, 캐나다로 출장을 가. 내 얘기를 좀 더 해줄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좋을 텐데.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기만 해.


P.S. 이치코상이 아프단 소식을 들었어. 당신이 걱정돼. 우리의 시간은 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차가 벌어졌어. 하루는 너무 길고 하루하루가 모인 시간은 빠르네. 얼른 이치코상이 괜찮아지길 바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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