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편지

20230829

by 채리 김

이치코상에게


여러 개의 어지러움이 뒤엉키고 있어. 호락호락하지 않은 표정을 짓고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숨기며, 여기 파크 애비뉴에 서 있는데. 밤은 건너편으로 길을 건너는 쥐 떼처럼 행인들을 놀라게 만들며 지나가고, 옆에 서 있는 친구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눈을 비벼. 우리의 파티는 늘 테킬라 샷과 라임, 그리고 랜덤의 칵테일로 시작하지. 오늘은 라임 대신 레몬을 빨아먹었어. 그 시작이 어느덧 한참 옛날의 얘기 같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우린 길가에 버려진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어. 다음 클럽이 어딜지 구글 지도는 알고 있으려나, 페이스 아이디로 폰을 열기 위해 자꾸만 초점을 잃어가는 눈빛을 렌즈에 고정하려 해. 너의 4개 핀 번호는 뭐니. 나의 4개 핀 번호는 내가 버린 숫자들이야. 웃기지.


여기서 이렇게 마냥 쳐져 버리면 다음 춤을 추러 가지 못해. 아니 사실, 목이 말라. 다음 술이 필요하니 몸을 일으켜 세우자. 비틀거림을 두려워하지 말자. 아무리 큰일이 난다 해도, 앞으로 엎어져 스타킹이 찢어지는 게 다일 거야. 맨해튼의 다운타운은 수요일 밤에도 이렇게 시끄럽지. 다 같이 놀자. 내 자유는 네 것이야. 어제 어딘가에 두고 온 내 치마는 다음 주쯤이나 다시 찾을 수 있을 거야. 잠시만, 잠시만. 멈춰봐. 여기 세탁소를 봐. 100년은 더 되어 보이는 다리미가 전시되어 있어. 친구는 번쩍이는 네온사인에 빛 번짐 공격을 받아 이 한밤중에 선글라스를 끼고, 나는 쇼윈도에 기대어 실밥이 다 풀린 흉상 마네킹 개수를 세어봐. 녹이 슨 미싱기는 이스트 빌리지 텅 빈 건물들 같아. 가난한 우리는 불평하지. 저렇게 멋진 건물들을 비워둘 거면, 우리 스튜디오로 쓰게 좀 달라고! 아까워 죽겠네. 어리석은 아이들은 공간이 없어 작업을 못 한다 생각하지. 사실 춤추고 엉망이 되는 게 더 재밌는 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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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하고 촌스럽지만, ABBA 노래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지. 내 테킬라 선라이즈는 네 어깨를 적시고, 네 잭앤콕은 내 허벅지를 적셔. 마시는 술보다 리듬에 맞춰 바닥으로 흘리는 술이 더 많네. 팁을 조금만 덜 줄 걸 그랬어. 어차피 저 귀여운 바텐더에게 세 번은 더 주문할 텐데 말이야. 한 번에 많이 줄걸 그랬어. 오늘 밤의 시작은 KGB 바의 시 낭독회였지만, 지금 우릴 봐. Duran Duran 노래에 스텝을 밟고 있잖아. 눈가에 나비를 그린 예쁜 여자애가 자연스럽게 우리 스텝에 동참해. 어깨 동무하고 머리를 흔들고, 그 애의 치마가 예쁘다고 칭찬하고. 그러다 그 애가 나를 감싸 안아. 나를 붙잡은 채, 저기 위 스테이지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며 소리를 지르지. 아하. 네 여자친구와 재밌는 게임을 하는 중이구나. 무엇이 너를 화나게 했길래, 여기 밑에까지 내려오게 되었니. 이미 가진 서로를 더 갖고 싶어 하는 너네의 마음이 참 사랑스럽다. 네 사랑을 위해 더 열심히 춤을 춰줄게.


동이 트기 전에 우리의 체력은 바닥이 나고. 향기로운 로비를 지나 의젓하고 깔끔한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 8층이야? 아니 6층이야. 취한 손가락은 뒤집힌 6을 누르고, 사실 우리 집은 8층이 맞았고.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문을 열면, 이미 시체가 되어버린 무리가 뒤엉켜 거실에서 자고 있어. 긴 부츠를 벗는 건 너무 힘들어. 대충 지퍼만 열어둔 채, 이름 모르는 네 친구들 위로 몸을 던져. 쏟아진 스텔라 맥주 때문에 담요가 다 젖었어. 그나마 축축하지 않은 재킷을 대충 덮고, 어찌어찌 빈틈을 찾아 눈을 감아. 이 재킷이 누구 거더라. 떠오르는 해와 함께 알코올 향이 날아가고, 아직 덜 분해된 체내 알코올은 내일 늦은 오전 블랙커피로 씻어 내리자. 잘 자.


P.S. 나를 끄는 법을 알고 싶어. 이치코상의 늦여름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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