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편지

20231003

by 채리 김

이치코상에게


나는 내내 여행자로 살고 싶었어.


반쪽짜리 알약은 내 안에서 무엇이 없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 톱가슴머리대장 벌레가 나를 갉아먹게 놔두려고. 약을 끊고 여행을 마저 하려고. 우린 모두 저장 곡물의 해충이야. 겨우내 잠들어 있던 아주 연연하던 마음을 쾌락으로써 여름 동안 실컷 날려 보냈지. 이제 장마가 시작되었고, 축축하게 젖은 대마초 냄새가 브루클린 골목에서 풍기고 있어. 친구는 창문에 붙어 있던 팬을 떼어냈고, 또 다른 친구는 서부 지역으로 가기 위한 비행기표를 예매했고, 또또 다른 친구는 봄을 마지막으로 외면했던 그린포인트로 나를 초대했어. 나는 늦은 오전, 커다란 치즈 버거를 먹고 낮잠을 잤어. 해충이 내 발목 뒤편에서 기어 다니는 게 느껴져. 지그시, 지긋지긋하게 내리는 햇살 줄기에 몇십 개의 고양이 털이 날리고, 나는 이만 이쯤에서 모든 걸 끝내야겠다는 결심을 해. 내가 저장해 오던, 혹은 나를 저장해 오던 사진들, 음악들, 그리고 그 모든 환락을 하나둘 지우려고 해. 애쓰고 있어. 그러려면 럼주의 도움이 필요하고, 숨이 가빠오는 빠른 걸음의 귀가가 필요해. 여행자의 소망은 찰나의 더위와 함께 씻겨 내려가. 친구는 우유를 사는 것을 깜빡했고, 나는 떨어뜨린 귀걸이 한쪽을 찾으려고 친구 집 바닥을 기어. 머리를 감을 때마다 보라색 물이 욕조에 넘실거려.


맨해튼 서쪽에는 더 이상 나를 위한 구색이 없어. 영어 대신 한국말을 다시 쓰고, 나의 언어는 사랑이라는 말을 통째로, 평생토록 짓뭉개버려. 밀린 빨래 더미에서 그제 밤 눈물 자국을 발견하고, 다 타버려서 꼬불꼬불해진 앞머리를 짧게 잘라. 수씨발만개의 요행이 서랍 안에 들어 있어. 너의 얼터너티브 천국에 나를 초대해 줘서 고마웠어. 환영받지 못한 여행자는 이따금 외로움을, 아니 자주 외로움을 탔지만, 함께 침묵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어. 서랍이 쓰레기봉투가 되어버렸네. 인쇄된 사진 세 장은 주목하지 않아도 이미 갈기갈기 찢겨 있어.


5분간의 졸음이 5시간의 숙면처럼 느껴지던 나날이 그리워지긴 하겠지. 아닌 밤 중의 갑작스러운 외출이 고파지기도 할 거야. 쿨하디 쿨한 애정들이 간편했었지, 하고 한탄도 하게 될 거고, 영혼을 무시하며 깨어나는 매일 아침을 다시 간절히 바라게 되는 날도 오겠지.


한 여행은 생각의 생각처럼 꼬리를 물고 다음 여행으로 이어져. 우리 안에서 없어졌던 것은 상상력이었어. 나를 탓하는 환청들과 내 잃었던 상상력을 맞바꾸려고. 이 거래는 값질 거야. 소원해 줘, 이치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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