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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윤 Jan 19. 2024

기분 좋아지고 싶은 날에는 육개장

나에게 육개장은 할머니의 따뜻한 위로다/소통의 해장국

 나에겐 국민학교 시절 할머니가 전주로 이사를 오셨다. 그 시절에는 외식을 한다는 것이 나름 특별 행사 같았다. 할머니가 이사 온 기념으로 첫 외식으로 육개장을 먹었다. 육개장을 좋아하시던 할머니의 취향 존중 메뉴였다. 나는 거의 고기를 먹지 않을 때지만 그때만큼은 맛있게 먹었다. 왜냐하면 동생들을 제외한 어른들의 식사에 나만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름 나도 어른 대접을 받는 것 같은 혼자만의 착각으로 더욱 신이 나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나는 매운 국물도, 잘게 찢긴 고기도, 질겅거리는 토란대도 싫었다. 아마도 같은 이유로 어린 동생들은 못 먹을 듯싶어 나만 데리고 가신 건 아닌가 싶다. 이유야 어떻든 나는 그날의 육개장을 생각하면 몹시 행복하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뿌듯함을 오래 기억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전주로 이사를 오셨지만 자주 집을 비우셨다. 절실한 불교 신자이셨기에 자주 절에 가시곤 하셨다. 절에서 제사를 지내고 가져오신 약과와 알록달록한 옥춘사탕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여러 이유로 할머니를 만날 때도 헤어질 때도 나는 그저 좋았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할머니의 긴 외출이 마냥 좋았다.


 97년 겨울 어느 날 할머니는 전에 없던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며 ‘잘 살아야 한다’라고 하시며 작별 인사를 하시고 가셨다. 그렇게 가신 할머니는 영영 돌아오질 않으셨다. 영원한 이별을 직감하셨던 걸까? 왜 유독 나에게 만 잘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남기고 가셨을까? 끝까지 해결하지 못할 궁금함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처연한 울음소리를 들었다. 언제나 단단하시던 내 아버지가 그렇게 슬퍼하시는 걸 처음 보았다. 저러다 아버지도 쓰러지시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렇게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다시 육개장을 만났다. 하지만 난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육개장을 먹을 수 없었다. 슬픈 기억으로 남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찬 바람 속에 할머니를 보내드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장례식장에 차려진 음식은 고인이 마지막 차려낸 음식으로 여겨 잘 먹고 고인의 명복을 빌어 주는 것이라 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슬픔을 위로해 주고 아픔을 함께 나누는 우리나라의 전통 관습 중에 하나가 바로 육개장을 먹는 것이라 한다. 또 육개장의 붉은 국물은 잡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조문객을 위한 고인의 마지막 배려가 바로 육개장이 아닐까 싶다. 때문에 나는 할머니의 장례식장에 차려진 육개장을 못 먹은 게 두고두고 아쉬웠다.     


 지금의 나는 조문을 할 때 꼭 육개장을 한 그릇씩 비우고 나온다. 사실 떡과 과일에 전까지 먹고 온다. 처음에는 슬픔에 겨워 못 먹고, 나중에는 슬픈데 배가 고프다는 현실에 어이없어 못 먹었다. 때론 먹지 못할 정도로 슬프고 아픈 날이 있기도 했지만 고인의 마음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먹고 나온다. 그리고 또 든든하게 다음 일정에 나선다. 이제는 여러 죽음에 익숙해진 탓인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장례식에 조문을 하러 가서 아주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함께 육개장을 먹고 웃음꽃을 피우기도 한다. 이렇게 또 새로운 소통이 시작되기도 한다.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도 그리웠던 이와 다시 인연을 시작하기도 한다.     


 처음 맛본 행복했던 기억 때문일까? 아니면 얼큰한 국물에 눈물, 콧물, 땀까지 싹 빼고 나면 풀리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기운이 없거나 기분이 좋아지고 싶은 날에는 육개장을 먹는다. 요즘은 육개장 체인점도 많고 맛도 각각 특색이 있어 그날 먹고 싶은 맛을 골라 먹는 재미도 있다. 그런데 되짚어보니 육개장을 먹을 땐 대체로 혼밥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빨간 국물의 육개장을 먹을 땐 앞치마를 두르고 먹어도 꼭 어딘가에는 흔적을 남기고 만다. 또 삐질삐질 흘리는 땀과 훌쩍이는 모습을 보이는 게 썩 편하지 않다. 또 가끔은 할머니와 외식했던 날의 육개장을 생각하면서 맛있게 먹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여전히 혼자 먹는 육개장이 더 맛있고 더 편하다.    

 

 나에게 육개장은 할머니의 따뜻한 위로다. 그래서 또 열심히 살아갈 원동력이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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