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밤

남겨진 온기들

by 김채이




10월의 밤, 밤이 깊자 개울물 흐르는 소리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마당까지 스며들었다. 불 꺼진 방에서 창문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어 방 안 가득 옅은 무늬를 그려냈다. 낡은 장롱 손잡이, 걸려 있는 교복, 바닥에 굴러다니는 펜들까지 달빛에 젖어 있었다. 밖에서는 귀뚜라미 울음이 간헐적으로 들려왔고, 그 소리마저 해린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했다.

오늘따라 밤은 더 길고 깊게만 느껴졌다.


해린은 자는 척 누워 있었다. 동생 효린은 정말 잠이 든 것 같았다. 효린의 발끝에 걸린 이불을 다시 올려주고 해린은 문쪽을 바라봤다. 곧 옆방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현관문이 살그머니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할아버지가 또 어딘가로 나가고 계신다.

이제 일주일째다.

해린은 불안하게 숨을 고르며, 혹시 할아버지가 정신이 흐려지는 건 아닌지, 치매가 시작된 건 아닌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며칠 전, 저녁 식탁에서 할아버지는 반듯하게 깎은 사과를 건네주셨다.


“니 할미가 늘 이렇게 해주곤 했지.”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목소리 끝이 잠시 떨렸다. 할아버지의 손목엔 할머니가 끼시던 묵주가 걸려 있었다.

해린은 그 주름진 손을 바라보다가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괜스레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해린은 문득 지난여름을 떠올렸다.

마당 한편에서 자라는 상추와 오이들에 물을 주고 계시던 할아버지, 해린과 효린은 그 옆에서 방울토마토를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할머니는 안방 문턱에 고개를 내밀고 더운데 이제 들어오라며, 그들을 부르곤 하셨다. 몸이 부쩍 야위어버리신 할머니는 어느덧 안방문턱을 나서기도 힘드셨고 자매는 막 딴 방울토마토를 할머니 입에 넣어드리며 할머니를 눈에 담았다.

그때는 당연했던 순간들이 이제는 더 이상 돌아오지 못할 기억이 되어 있었다.


밤공기가 싸늘하다며 매일 밤마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자매의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주었다. 그 손끝의 거칠고 무거운 감촉은 자매를 안심시켰다. 할아버지의 손길을 떠올리자 해린의 가슴은 다시 먹먹해졌다.

이제 할머니도 없는데, 혹시 할아버지마저 잃게 되는 건 아닐까.


중학생을 벗어난 동생 효린은 요즘 들어 불평을 자주 하기 시작했다. 학원, 과외 등 욕심도 많고 목표도 높지만, 해린은 여력이 없었다. 자신이 못하더라도 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해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해린은 엄마가 아니었다.

더구나 이제 할머니도 없는 집엔 할아버지뿐이다.


해린은 할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뜬눈으로 버티며 생각했다. 기억나지 않는 엄마의 얼굴. 동생이 태어나자마자 엄마는 곧 세상을 떠났다. 아주 가끔씩 아빠의 연락을 받았지만, 어차피 우릴 떠난 아빠였다. 효린은 아빠의 연락조차 달가워하지 않았다.

자매의 삶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보낸 시간이 다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해린은 가족을 잃는다는 건 가슴을 한 움큼 떼어내는 것과 같다고 느꼈다. 아직은 해린도 어렸다. 하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더라도 이 상실을 받아들이긴 힘들 것 같았다.


해린은 이제 할아버지마저 잃게 될까 봐 무서웠다. 방안을 채운 은은한 달빛에 기대어 해린은 귀뚜라미 소리너머 할아버지의 발소리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뜬 눈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해린은 할아버지의 조심스러운 인기척을 듣고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밤, 해린은 할아버지의 소리에 집중했다. 곧이어 현관문이 열리자,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따라나섰다. 자잘한 들꽃들이 길 양옆을 채우고 있었고, 논에서 풍기는 가을 벼 냄새와 볏짚 타는 냄새가 바람결에 섞여왔다. 조금 멀리,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어슴푸레 보였다.

치매로 잃을까, 영영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닐까 조바심이 났다.

길은 달빛에만 의지해야 했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그림자처럼 덮쳤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가 금세 사라졌다. 해린은 휴대폰 화면 불빛만 켜둔 채 발소리를 죽이며 걸었다. 고요했다.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은 어느 순간 달빛에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가시는 길이 익숙했다. 논두렁의 이슬이 바짓단에 묻었지만 그 촉감마저도 낯설지 않았다. 해린은 따라 걸을수록 눈앞이 흐려지는 게 느껴졌다. 십여 분 정도 걸었을까. 할아버지는 해린이 예상한 곳에 멈춰 섰다.

아직 풀이 다 자라지 않은 작고 둥근언덕. 할머니의 묘지였다.


할아버지는 묘 앞에 앉아 흙을 쓰다듬으셨다. 손목의 묵주를 손에 쥐고, 할머니가 그랬듯 한 알 한 알 매만지셨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묵주의 알들이 제 주인을 알아보듯 반짝였다.


“오늘은 어떠셨소?”


할아버지의 안부 인사가 공기에 퍼졌다. 할아버지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이야기하셨다.

해린과 효린의 사소한 일상, 마을에서 있었던 작은 소식들. 말씀 사이사이 짧은 웃음소리가 섞였고, 또 어떤 순간에는 울먹임이 묻어났다. 하지만 목소리엔 언제나 그렇듯 다정함이 가득했다. 멀찍이 서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해린은, 묘지 너머에 정말 할머니가 앉아 계신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바람결에 풀잎이 흔들리고, 달빛은 묘지 위에 은빛 그늘을 드리웠다.


해린은 천천히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갔다.


“할아버지…”


작고 떨리는 목소리에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멈췄다. 해린은 조심스레 할아버지 곁에 앉았다. 거친 손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해린의 손등을 덮었다. 오래도록 흙을 만져온 손바닥은 굳고 투박했지만, 그 안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해린은 할아버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할아버지는 묵묵히 묘지를 바라보고 계셨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해린 어깨에 낡은 겉옷을 덮어주었다.


“밤공기가 차다. 니 할미도 늘 니 감기 걸릴까 걱정했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해린은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밤길은 더 깊어졌고, 논두렁 사이로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멀리서 또다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가 금세 사라졌다.

할아버지의 손바닥은 여전히 거칠고 굳었지만, 그 온기가 해린의 손끝을 타고 마음까지 스며들었다.


“너무 보고 싶구나.”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할아버지의 숨 끝에 미세한 떨림이 실려 있었다. 해린은 대답 대신 손을 더 꼭 움켜쥐었다.


언젠가 이 손도 놓아야 할 날이 오겠지만,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놓고 싶지 않았다.

10월의 밤은 이 온기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다.


본 글의 인물과 사건들은 자전적 경험에서 출발했으나, 여러 파편을 엮어낸 창작소설임을 밝힙니다.



할아버지,

어릴 적 밤외출의 사연을 처음 들었을 때,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물려받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할머니 곁에서 오래도록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