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

by 차구마

'차구마' 점포는 움직이지 않는 트럭 위였다. 오래된 트럭은 고장 나 멈췄지만 나는 움직여야 했다. 수명이 다한 초록색 트럭 위에서 나는 하루하루 연명했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최선을 다했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군고구마를 팔았다. 그렇게 제주에서 겨울을 보냈다.


장사를 마감하고 바람을 겨우 막아줄 뿐인 트럭 운전석에 앉아 하루를 정산하면,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눅눅한 지폐들을 세고 다시 또 세는 날이 있었다. 쉼 없이 굽고 팔아서 장작은 다 타고 고구마는 동이 났는데, 겨울을 품은 차가운 바닷바람을 온종일 버텨냈는데, 허리에 졸라맨 전대에 남겨진 건 꼬깃한 지폐로 5만 원 쯤. 그마저도 고구마 원가를 빼고 나면 내 하루는 만오천 원쯤 남는 날. '나는 장작 앞에서 내 시간만 태우고 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드는, 허탈하고 허무한 그런 날이 있었다. 분명 그런 날들이 적지 않았다.

어느 그런 날, 무기력한 마음을 추스르고 무거운 몸을 달래며 고구마통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고구마 한 알. 남겨뒀다 내일 다시 구울까, 잠시 고민하다가 뒤뜰에 묻었다. 작은 몸집으로 꼭꼭 숨어서 불과 바람을 피해 버텨온 그 한 알의 고구마가 어쩐지 나와 비슷했기에, 그리고 하루를 간신히 버텨낸 그런 작은 녀석이 어쩌면 다시 싹을 틔우고, 줄기를 세우고 다시 고구마를 주렁주렁 매달지도 모른다는 그런 묘한 기대감을 외면하기 싫었기에. (감정이입, 희망, 대리만족...지금 생각하면 오글거리고 민망하지만, 뭐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녀석을 묻은 뒤로 나는 녀석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헛된 기대감은 버려야 했고, 큰 도움은 바라지 말아야 했다. 뿌리를 깊게 내렸으면 했고, 줄기를 곧게 뻗었으면 했다. 스스로 버텨내 잘 자라나 스스로를 대견해 했으면 싶었다. 그런 '차구마'가 되었으면 싶었다. 누가 그랬으면 좋겠는지, 그 마음들의 주어는 알 수 없었다. 녀석에게 전했던 마음인지 나에게 전했던 다짐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시간이 꽤 오래 지났다. 나는 제주를 떠났다. 녀석의 소식은 알 수 없다. 사실은 알고 싶지도 않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지금은 그저 결말이 활짝 열린 추억으로 남기고 싶다. '그런 날'의 만오천 원도, 작은 고구마 한 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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