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오리털 패딩에 대하여

by 차구마

너는 ‘가볍게 겉옷 하나 걸치고 나오면’ 되는 날씨가 됐다. 별 보러 가기도 괜찮을 만큼 제법 따뜻한 초봄이다. (물론 원곡은 가을밤을 노래하고 있지만.) 이런 달달한(?) 고백조차 가능해지는 날씨가 반가우면서도 가끔은 어이없다. 겨우 며칠 전까지도 그렇게 추웠는데. 두껍게 입고 다녔던 패딩이 민망하게 옷걸이에 걸려있다. 나름 큰맘 먹고 구매했던 스포츠 브랜드 패딩이다. 올겨울은 추우니까 이왕이면 좋은 거, 더 따뜻한 걸로 사서 오래 입자고 했던 그 검은색 오리털 패딩. 올겨울은 춥다는 소리는 매년 들었고, 또 매해 겨울은 춥긴 했어도 항상 견딜만했었단 걸 알았지만, 그래도 심플하고도 세련된 검정 패딩의 멋스러움에 못 이기는 척 구매하고 말았다. 어쨌든 올겨울엔 어딜 가든 그 패딩을 챙겨 입었으니, 잘 사서 잘 입은 게 맞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하며 옷걸이에 걸린 패딩 소매를 괜히 한번 만지작거린다. 오리털이 벌써 빠졌나. 처음보다 부피가 줄어든 거 같기도 하고.


오리털 패딩의 기원을 찾으려면 ‘라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겠다. 패딩은 인류의 긴 역사와 함께 해왔겠으나, 내 기억 속에 패딩이 독자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건 학창 시절이니까. 겨울=패딩의 계절이란 공식은 학창 시절 노스페이스의 등장과 함께 각인됐다. 너도나도 교복처럼 비슷한 패딩을 고 다녔는데, 비스무리한 패딩끼리도 600이니 700이니 하면서 숫자로 등급이 나뉘었다. 검정, 회색 따위 무채색에서 시작해 파랑이니 빨강이니 하는 다채로운 색깔의 변화까지 보여주며 그놈의 두툼한 패딩은 점차 진화해갔다. 물론 나는 노x페이스의 그 살벌한(?) 가격에 그나마 저렴한 나x키 패딩을 겨우 입는 수준이었고, 똑같은 패딩을 입고 있는 친구 놈들을 딱히 부러워한 것도 아니었으나, 가끔 추운 교실에서 두툼한 패딩을 입고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친구들을 보며 저놈들은 세상 어떤 추위도 두렵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은 했다. 가만, 그런 패딩을 입었던 놈들은 기억나는데 그런 패딩을 입지 않았던 놈들의 기억은 희미하다. 두툼한 것, 그 압도적 존재감에 시선을 뺏겨 얇은 솜패딩이나 낡은 코트를 살피지 못했던 탓이겠지.


한 친구가 있었다. 학창 시절보다 조금 더 어렸던 어느 날, 그 녀석은 사고로 한쪽 팔을 잃었다. 팔이 한쪽이라 녀석은 동네에서 유명했다. 크게 문제는 없었다. 녀석은 팔을 잃고도 유쾌하고 건강했으니까. 녀석은 항상 씩씩하게 학교에 다녔다. 학창 시절엔 가끔 일탈을 했던 것도 같지만, 친구들과도 곧잘 어울렸다. 의수를 빼고 자연스레 돌아다니기도 했고, 의수를 빼서 친구들과 장난을 치기도 했다. 팔꿈치 위로만 남아있는 녀석의 앙상한 팔뚝을 보며 나는 그게 용기라고 생각했다. 숨기고 싶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과감히 드러내는 큰 용기. 그러니까 정말로 크게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른이 됐다. 친분이 깊지 않았기에 녀석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녀석의 소식을 들었다. 그놈이 죽었단다, 그 나쁜 놈이 먼저 가버렸단다, 그렇게 말하며 지인은 울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다 혼자서 떠났다고. 그러고 보니 녀석은 항상 옷을 얇게 입었다. 겨울에도 가끔씩 반팔을 입고 다녔을 정도로. 두툼한 패딩의 온기, 혹은 동정 따윈 필요 없다는 듯 당차게 살다가 녀석은 갑자기 떠나버렸다. 지금처럼 따뜻한 봄날이었다. 많이 추웠을까. 한쪽 팔로 세상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너무 벅찼을까. 사실은 따뜻한 패딩이, 온기가, 누구보다도 더욱 필요했었던 걸까.


사람의 몸을 덥히는 건 대부분 아름답다. 패딩, 포옹, 꼭 잡은 손, 따뜻한 말과 행동과 마음 따위. 봄은 왔는데 여전히 차디찬 소식들을 들으면서 나는 갑자기 오리털 패딩을 생각한다.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것들. 그리고 그 따뜻한 것들이 미처 감싸지 못해 겨우내 싸늘하게 죽어간 것들. 온기, 온정, 온갖 아름다운 것들이 필요했던 약한 존재들을 슬퍼하면서, 나는 한겨울 내 몸을 감쌌던 오리털 패딩의 미세한 온기를 기억해본다. 추운 날 빛나고, 따뜻한 날 아련해지는 느낌. 사람을 품는 힘이란 게 대체로 그렇다. 솜털 8 대 깃털 2 비율의 온도 같은 것.


슬픈 겨울이 지났다. 두툼한 패딩들이 옷장 깊은 곳에 걸리기 시작했으니, 어쨌든 우린 또 한 차례 겨울을 이겨냈다는 소리다. 힘겨웠던 겨울, 그리고 다시 봄이다. 오늘의 날씨는 화창하지만 그래도 기억해야 할 사실들. 따뜻한 날에도 따뜻함은 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갑자기 오리털 패딩이 생각나는 봄날도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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