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 2015
졸업했다. 09년에 입학해서 16년 시작하는 시점에 학교를 나간다. 꼬박 7년. 그리 길게 느껴지진 않는다. 군대를 2년 다녀왔단걸 생각하면 제 때 졸업하는 셈이다.
수능 직후엔 교대에 가려고 했다. 방학이 있다는 사실, 안정적이고 나름 재미있는 삶이 가능할 것 같다는 추측, 무엇보다 서울 소재 사립대의 비싼 등록금에 대한 우려 때문에 집 근처 광주교대에 가길 희망했다. 근 4백만원에 육박하는 돈을 4년간 1년에 두 번씩 꼬박꼬박 낼 수 있을까. 시작하자마자 빚을 지고 대학을 가고 싶지도 않았다. 빚은 참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남자새끼가 무슨 교대냐. 그럴거면 그때 사관학교를 가지 그랬냐"는 아빠의 극심한 반대로 결국 무산됐다. 그때 내 의견을 밀어붙였더라면 삶의 궤적은 한참 다른 선을 그리진 않았을까, 썩 나쁘진 않았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인생 최악의 영어성적을 하필이면 수능에서 받았으나, 나머지는 잘 봤다. 초중고를 시골에서 나온 나는 농어촌 특별전형을 쓸 수 있었다. 서울로 대학을 가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냥 쓰면 됐다.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으로 진학했다. 어렸을 때부터 사회과목을 좋아했다는 게 이유였다. 대학 간다고, 이제 놀고 싶은 대로 놀 수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주 비싼 졸업장을 따러 간다고 마음 먹고 상경했다. 서울이 뭐라고 그렇게 멀게 느껴졌다. 집을 떠나는 게 슬펐다.
여전히 서울의 첫 이미지를 기억한다. 영어 시험을 보러 올라왔었다. 시험은 더럽게 어려웠고, 날은 서럽게 추웠고, 하늘은 신촌의 그 더럽고 시커먼 바닥을 똑같이 투영하고 있었다. 차가운 눈비가 내렸고, 사람들은 바깥의 그 서러운 추위를 끌고 지하철로 들어왔다. 나는 대학에 간다고 산 옆으로 메는 가방을 앞으로 메고 지하철에 탔다. 개강 전에는 칙칙한 분위기의 구로 친척집에 잠시 살았고, 며칠 후에는 동창 몇몇이 살고 있는 남도학숙에서 첫 짐을 풀었다. 생판 모르는 남과 룸메이트가 됐다. 소통수단이라고는 산 지 얼마 안 된 핸드폰이 다였다. 서울이 참 싫었다. 모든 게 시궁창같은 회색이었다. 외딴 곳에 떨어졌다.
의외로 금방 적응했다. 봄이 되어 날이 풀렸다. 이 학교에는 꼭 재수없는 부잣집 애들만 있을 줄 알았는데 적어도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대학교 1학년 학생들은 서로 친해지기 위해 애를 썼다.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김밥을 입에 물고 수업을 듣겠다고 뛰어갔다. 한 군데서 엉덩이를 붙이고 듣는 게 아니라 교실을 옮기며 수업을 듣는다는 사실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나의 1학년은 평균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즐거웠다.
군대에 다녀오고 무척 달라진 교정을 봤다. 아무 생각없이 도서관에 다녀왔다. 아무 일도, 만날 사람도 없건만 가고 싶었다. 서울에서 나에게 익숙한 공간은 학교뿐이었다. 까맣던 도서관은 하얗게 변해있었다. 내가 돌아온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새로운 곳에 있는 기분이었다. 애써 익숙해진 공간이었는데 다시 어색해졌다. 개강했지만 몇몇 친구들만 가끔 보는 수준이었다. 예전의 그 동기도 아니었다. 서로 과도 달라졌고, 듣는 수업도 달라졌다. 혼자 듣는 강의도 꽤 있었고, 아는 사람이 있어도 따로 들었다. 반방은 사라졌다. 연희관에 내가 마음 편하게 앉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각자 갈 길이 달라진다는 건 그랬다. 혼자 먹는 점심이 익숙해졌다. 첫 한달이 참 쓸쓸했다.
전역 즈음 막연하게 기자가 되고싶다 생각했다. 학내언론에서 연습을 해보고 싶었다. 눈에 들어온 게 연세지였다. 말년휴가 때 들고 온 책을 꼼꼼하게 읽고, 피드백을 보냈다. 복학하고 논술시험을 쳤다. 시험장소에서 여름과 온결이라는 친구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연세편집위원회에 들어갔다.
교지활동은 내 대학 생활의 가장 밝은 조각이다. 좋은 사람을 만났고, 생각을 나눌 수 있었다. 아무때나 갈 수 있는 편집실이 생긴 것도 좋았다. 추억은 오래 머문 공간에 자리잡는다. 매호의 작업이 끝나면 사람을 보내고, 다시 사람을 받았다. 손때묻은 까만 테이블, 지저분한 라꾸라꾸침대와 소파. 덜컥거리는 프린터와 컴퓨터. 구석에 쌓인 책과 잡지. 신문. 교정지. 먹다 남은 간식들. 말라죽어가는 식물까지. 나는 그 공간의 거의 모든 것을 사랑했으며, 거의 모든 것에 마음을 쏟았고, 거쳐간 모든 사람을 좋아했다. 너무 자주 가지 않으려 했지만 자주 갔고, 매번 누군가 들어오길 기대했다. 가는 사람에 아쉽고, 들어온 사람을 마음에 담다가 때가 됐다고 생각해 나갔다. 생의 다음 단계를 밟기 위해서는 나가야 하는 공간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포이동 인연 공부방도 기억에 남는다. 처음엔 귀찮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애정을 쏟고 있는 나를 봤다. 어스름 저녁의 동네 어귀가 반가웠다. 꼭 어렸을 때 살던 동네 생각도 났다. 모두가 편하진 않았지만, 편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우린 서로 할 말이 많은 사이는 아니었는데도 같이 날을 새며 술을 마셨다.
교지활동과 포이동을 마무리하고는 어영부영 한 학기를 보냈다. 얼마 남지 않은 수업을 들으면서 자소서를 썼다. 첫 자소서에서 별 의미 없는 말들을 주워섬기다 박살이 났다. 커리어 사이트를 들어가고 취업준비 카페에 가입했다. 취업정보를 마주치는 순간마다 무척 초라해졌다. 누구를 뽑는다는 말이 그렇게 비참했다. 매물로 나온 나를 바라보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별 일도 아닌데 자존심이 상했다.
이내 적응하고, 무덤덤해지다가, 새로운 방향도 모색했다. 많은 지원서를 썼고, 우울한 학교 시험장에 들어가 필기를 쳤으며, 간혹 면접을 봤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일상에 품고 살았다. 그러다 취직이 됐다. 반 년쯤 일했을 때 졸업식이 왔다. 하루 휴가를 내고 가서 졸업장을 받아왔다. 눈이 펑펑왔다. 사람은 드글드글한데, 만날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말이지 시시했다. 아 이렇게 끝나는구나. 수중에 돈이 없을 때는 서른쯤으로 시간을 당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흘러버린 시간을 마주하니 아쉽고 서운하고 허전했다.
더 이상 들을 수업이 없어서 연희관에 가지 않고 도서관에만 박혀 있는 순간에, 그때 이미 내 학교 생활은 사실상 끝이 났다. 5개의 수업을 듣던 그 봄 학기가 내 대학 생활의 마지막이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는 걸 지나고 나서야 알아버렸다. 아쉬운 것들은 지나고 나서야 돌아보라고 빛을 낸다. '그때가 좋았더라' 생각했다가 말로 꺼내자니 너무 늙어버린 것 같다. 말은 다시 입속에, 글은 서랍에 가두어 둔다. 나의 대학생활은 그렇게 지나갔다. 나는 졸업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