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전하는 법정의 내면의 이야기
‘사’자 직업 중에서도 특히 우위에 있는 법관의 이야기는 나에게 늘 ‘그들이 사는 세상’이었다. 한 달 동안 시즌 7까지 몰아본 미드 ‘슈츠’를 제외하곤. 그들의 세상이 사실 그렇게 멀지만은 않은 이야기였구나, 어쩌면 나와 가장 가까운 곳의 일일 수도 있구나를 알게 해 준 책이다. ‘마지막 물기 한 방울까지 짜내고 짜낸 메마른 문장’이라는 판결문은 무덤덤하게 쓰인 듯 보이지만 한 글자에 많은 이야기를 담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지가 묻어난다. 모두 공감이 가고, 반성도 되어서 책을 읽는 내내 특정되지 않은 누군가에게 참 미안했다. 학원에서 함께 일하는 혜민쌤이 추천해준 책인데, 내용뿐만 아니라 문장도 너무 좋고, 간직하고 싶은 인용구도 많아서 쌤한테 너무 감사할 따름 헤헤. 기록해두고 싶은데 책전체를 옮겨야 할 판이다. 어렵지 않으면서 내용에 깊이가 있어 사람들이 많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판결문은 법적으로 의미 있는 사실만을 추출해 일정한 법률효과를 부여할 뿐 모든 감상을 배제하는 글이다. 민사든 형사든 판결문은 매우 엄정한 형식과 표현을 써야 하는데, 그나마 판사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형사 판결문의 ‘양형 이유’ 부분이다. 양형 이유는 공소사실에 대한 법적 설시를 모두 마친 후 판결문 마지막에 이런 형을 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는 곳이다.
이 책은 곧 1심 판결문이고, 독자는 당사자이면서 곧 상급심이다. 상급심은 1심의 결론을 받아들여 판결을 인용할 수도 있고, 결론이 틀렸다고 파기할 권한도 있다. 이 책의 독자는 “이봐, 당신은 틀렸어. 판사로서의 당신 삶을 파기한다”는 주문을 낼 수도 있고, “결론은 용케 맞췄군. 이 판결을 인용한다”는 주문을 낼 수도 있다. 국민은, 불복할 수 없는 상급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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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는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적응과 망각은 놀라울 정도로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암울한 현실을 애써 잊고 하루빨리 일상으로 복귀하고픈 본능은 집요하다. 평온한 삶을 지속하고 싶은 관성은 이성이라는 브레이크를 마모시키고 무력화한다. 상처를 얼기설기 봉합하고 활시위처럼 재빨리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그 복귀의 탄성에 날아간 화살은 각자의 가슴 깊숙이 박히기 마련이다. (p. 23)
사람이라는 부분은 해석상 별다른 의문이 없을 것 같지만 태아를 사람으로 보면 살인죄가 되고, 사람이 아니라고 보면 낙태죄가 되고, 뇌사를 어떻게 볼 것이냐에 따라 법적문제가 대두된다. 성범죄에서 흔히 문제되는 폭해오가 협박, 위력, 동의 등의 개념은 사람의 시기와 종기보다 몇 배는 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영역이다. 사실관계가 증거, 특히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주로 따지는 영역이라면 해석은 문자의 의미와 가치관, 감수성의 영역이다. 해석은 옷감과 비슷하다. 작은 옷에 억지로 몸을 욱여넣으면 단추가 터져버리지만 옷감에 신축성이 있다면 가능하다. 그러나 아무리 신축성이 있어도 담을 수 있는 용적에는 한계가 있다. (p. 35)
피해자다울 필요도, 피해자다움을 입증할 필요도 없다. 피해자다움이 무죄의 논거가 될 수도 없다. 무엇답다는 말만큼 추상적인 말도 없다. 수전 손택이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질병 자체보다 질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지적하여 정치적 수사 속에 숨은 은유의 파시즘을 비판했듯, ‘이런 모습이 피해자다’라고 정의하는 것은 폭력적 은유다. (p. 40)
허균의 누이이자 천재시인이었으면서도 시대를 잘못타고나 불운한 삶을 살다 간 허난설현이 생전에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세 가지 한(여자, 조선, 김성립의 아내로 태어난 것)을 떠올리면, 지금의 인식이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진다. 질곡을 벗어난 지 한참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그 부근이라는 인식은 우리를 절망에 빠뜨린다. 김성립 자리에 내 이름을 넣어봤다. 어울릴 수 없다고 부정해보지만 장담은 못하겠다. 순간순간 김성립이었던 적이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p. 41)
꽃이 만개하고 나무가 푸름을 더해 가는 날이면 그때만큼은 이 지구라는 행성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나무와 풀과 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온전히 이 행성의 참된 주인이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소나무며 이름 모를 나무들이 하늘과땅 모두를 촘촘히 채운 숲을 거닐다 유난히 커 보이는 소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앉으면 나뭇가지를 유영하던 바람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그 숲에서 본다. 인간과 달리 나무는 땅속과 하늘로만 제 갈 길을 갈 뿐 욕심을 부려 다른 나무의 길을 막는 법이 없다는 것을. (p. 57)
피해자는 강간당한 것보다 칼로 자신의 생명을 위협당한 것이 더 무섭고 고통스러웠다고 거듭 호소하면서도 피고인에 대한 관용을 구했습니다.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악행을 저지른 다른 사람에게 더 관대한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는 일종의 신비입니다. 아마 그들은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p. 80)
몇 년 전 EBS 다큐 <극한의 땅>에서 히말라야 꿀사냥꾼, 빠랑게를 본 적이 있다. 수백 미터 절벽에 대나무 줄사다리를 걸치고 꿀을 타는 그는 그 꿀이 있어야 그의 딸이 카트만두로 공부하러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 주위에도 생계와 부양이라는 숙명에 맞서 절벽을 오르는 빠랑게가 얼마나 많은가. 세상 모든 부모의 이야기는 빠랑게나 허삼관 이야기의 변용이다. 그들은 가족을 위해 절벽에 몸을 맡기고 벌떼와 싸우는 빠랑게거나 아픈 아들을 위해 피를 파는 허삼관이다.(p. 90)
과로사나 산재사망 사고 재판을 하다 법정에 오도카니 웅크린 유족들을 보면 문득 하늘이 무너져 이들을 덮치는 장면이 떠오른다. 나도 놀라 덩달아 올려다본다. 내 하늘은 온전하다. 나는 홀로 높고 푸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하늘을 가진 나 같은 자들은 제 머리통만 한 하늘을 이고 삐죽삐죽 솟아오른다. 내일도, 모레도 여기저기서 누군가의 하늘이 무너질 것이다. 뻥 뚫린 하늘마다 비치는 햇살이 정녕 고울까. 내 하늘은 그대로여서 평안할까. 일과 삶의 균형 속에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넘치는 저녁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빨다가 나는 목이 메었다. (p. 92)
사람의 샘명을 손익계산서와 대차대조표의 숫자로만 파악하는 부도덕한 기업에게는 손해배상과 더불어 징벌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윤추구가 지상과제인 기업에게 인명을 홀대하는 것이 종국에는 막대한 불이익으로 귀결된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각종 산재사고, 환경오염, 식품범죄, 제조물로 인한 소비자 피해 등이 무한 반복되는 이유는 , 아무리 많은 노동자가 죽어나가도, 아무리 많은 살인 가습기살균제를 팔아도, 아무리 많은 차에서 불이 나도, 아무리 많은 배가 침몰해도 형벌과 손해배상이 언제나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p. 96)
위험을 외주화하고 하루 평균 노동자 다섯 명이 사망하는 나라, 하루 평균 노동자 다섯 명이 사망해도 원청업체의 이윤이 늘기만 하면 죽음도 기꺼이 용인하는 나라, 하루 평균 노동자 다섯 명의 죽음을 용이하며 이윤만 추구하는 연 매출 수조 원의 대기업에 가해지는 형벌이 고작 벌금 천 만원이 전부인 이 나라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옴에 가장 적확한 단어는 퇴근이나 귀가일 수 없다. 생환이다. ‘저녁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삶이 있는 저녁’을 걱정하는 노동자와 그 가족이 다수 존재한다는 현실은 서글프기 그지없다. (p. 98)
이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편견은 진영을 만들고 진영 속에서 강화돼 차별과 혐오를 낳는다. 집단 혐오는 사적 혐오를 정당화하고 그 집단을 혐오하는 다른 집단을 만들어낸다. 소수자 보호에 대한 담론은 인류애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불멸의 신성가족으로 취급받는 나조차도 열두어 시간만 날아가면 노 잉글리시라고 무시당하는 유색인종일 뿐이다. 다수자의 지위는 불안정해서 시공과 잣대만 슬쩍 바꿔도 바로 역전된다. 우리는 모두 소수자다. 흑백 인종분리 교육의 부당함을 홀로 지적하며 “우리 헌법은 색맹이다”라고 일갈한 존 마셜 할란 대법관을 소환할 필요도 없다. (p. 104)
나의 존재는 타자에 의해서만 증명된다. 타자는 나를 설명함으로써 내 존재를 입증한다. 나 역시 나와 관계있는 타자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주석이다. 많은 이에게 언급되고 설명되는 이는 운 좋은 사람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누구에 의해서도 거론되지 않는 사람들,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 사회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설명은 줄어든다. (p. 105)
테드 창의 놀라운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 <일흔 두 글자>라는 소설에서는 사회적 적명이 사람들을 작동시킨다. 사람글은 적명을 부여받아야만 잠재된 힘을 발휘하는 자동인형 같다. 이들이 게으르고 하자가 있어 길거리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명칭이 없어 주저앉은 것이다. 노숙인, 동남아인, 동성애자, 성전환자, 난민은 이들의 적명이 아니다. 이들의 적명은 갑수 씨의 장남, 영희씨의 남편, 무함마드의 아빠이거나 배관공, 무용수, 회사원, 건설노동자, 주방보조, 편의점 직원, 캐셔, 식당알바다. (p. 106)
내가 쓰는 판결의 할머니와 김씨와 블랑카 씨가 나무 이파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흔하고 별볼이럾고 언제 나무에서 탈락해버릴지 몰라 늘 파들거리며 자글자글 불안에 떠는 연약한 존재지만, 나무는 이파리의 광합성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소수자는 보이지 않지만 우주의 4분의 1을 구성하는 암흑물질이거나 우리 사회의 가장 변방에서 호흡하는 피부 같은 사람들이다. 왜 소수자를 보호해야 하냐고? 잎이 없고 피부가 없으면 유기체가 죽고 암흑물질이 없으면 우주가 존재하지 않듯, 다수가 소수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소수자가 그들을 보호한다. 아니, 그저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살아갈 뿐이다. (p.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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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스 인 부츠, 장화 신은 고양이를 위해 변명하자면 한 때 나는 사악한 고양이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크고 검은 눈망울을 깜빡거린다고 생각했다. 이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원래부터 순진무구한 새끼고양이는 늘 적대적이고 거칠기만 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강한 척, 사악한 척 위악을 떤 것일 뿐임을, 비행과 하악질은 자신을 구해달라는 아이들과 새끼고양이의 간절한 절규였음을, 이제는 알고 있다. (p. 137)
영화 <스포트라이트>의 잘 알려진 대사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망을이 필요하듯,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 한 아이가 망가지는 데도 온 집안과 마을이 필요하다. 이 아이들이 모두 엄벌을 받아야 한다면, 아이들을 유기하고, 방치하고, 학대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은 부모와 가족, 그 아이들 중 누군가와는 같은 마을 사람들인 우리도 함께 엄벌을 받아야 한다. (p. 149)
“햇볕은 감미롭고, 비는 상쾌하고, 바람은 힘들 돋우며, 눈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세상에 나쁜 날씨란 없다. 서로 다른 종류의 좋은 날씨가 있을 뿐이다.”(존 러스킨) 세상에 나쁜 아이도 없다. 서로 다른 처지의 좋은 아이만 있을 뿐이다. (p. 151)
흔히 기억의 왜곡과 관점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을 들곤 한다.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사실관계가 많이 다른 점으로 보면 <라쇼몽>은 기억의 왜곡이나 관점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다. 상반된 입장에 선 사람들의 말만으로는 진실을 판단할 수 없다. 인지부조화에 굴복한 기억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실제 재판 역시 과거의 회상, 즉 플래시백이 재판의 본질이다. 짧고 단속적인 기억의 플래시백으로 사실관계를 확정하는 재판은 험난하고 위험하다. 그 누구도 진실을 모른다. 심지어 당사자 본인조차. 우리에게 있어 과거의 우리는 완전한 타자다. (p. 169)
<더 그레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 중 “오늘을 살고 오늘을 죽는다”는 대사가 있다. 우리는 매일 망각으로 버티지만, 역시 망각으로 하루하루 죽어간다. 루이스 부뉴엘은 “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 봐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억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통일성과 이성과 감정, 심지어는 우리의 행동까지도 기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p. 171)
흔들리는 배 위에서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야 중심을 잡을 수 있다. 흔들리지 않는 삶은 주위 여건이나 환경이 흔들릴 때 여지없이 넘어진다. 레미콘 차량 속 콘크리트는 끊임없이 돌려야 응고되지 않는다. 멈추면 굳기에 흔들려야 한다. 나를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그 상반되는 손길에 몸을 맡겨야 하고 그들이 이끄는 곳까지 기꺼이 가봐야 한다. 정반대 지점에 서봐야 한다. 강 건너의 풍경은 같은 편에서가 아니라 강 건너편에서 더 잘 보인다. (p.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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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알코올, 도박 같은 습벽 때문에 반복되는 범행이나, 정신 질환이 있는 피고인들은 사건이 상당히 많다. 이들과 그 가족뿐만 아니라 사회 방위 측면에서 봐도 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일시적 구금이 아닌 적절한 치료, 지속적 관찰과 감시, 배려임에도 판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두려움의 원천은 미래에 있다. 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두려움이 없다.”는 밀란쿤테라의 말처럼 이들이 정말 무서운 이유는 미래를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법정은 이런 빌런으로 넘쳐난다. (p. 206)
여덟 명이 농구공을 패스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하얀색 옷을 입은 네 명의 패스 횟수를 세라고 하는 실험이 있다. 사람들 사이로 고릴라가 지나가도 상당수 사람들이 고릴라를 보지못하는 ‘부주의맹’ 실험이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부주의맹이나 확증편향은 전문가조차 피해가기 어려운 인지적 오류 현상이다. 그러나 바짓가랑이 한번 걷어보라고 하지 않은 재판은 부주의맹이나 확증편향과는 다르다. 이는 의도된 눈감기다. 피고인과 변호인은 가혹한 고문이 있었다고, 농구공을 패스하는 사람들 사이에 거대하고 시커먼 고릴라가 한참동안 서 있었다고 줄기차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더 부끄러운 사실은 바짓가랑이 한번 걷어보라고 한 적도 없이 판결한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사과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사죄는 늘 후배들의 몫이었다. (p. 228)
“힘 없는 정의는 무력하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정의와 힘은 동시에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정의가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의가 되어야 한다. 정의는 시비의 대상이 되기 쉬우나, 힘은 시비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정의는 강해지기 힘들다. 결국 강한 것이 정의가 되었다.”는 파스칼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철석같이 믿는 법적 정의도 결국 강한 힘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우겨도 그건 그저 힘이지 정의가 아니다. 법감정은 단순히 격앙된 감정상태가 아닐, 힘이 약한 정의일 가능성이 높다. 들끓는 법감정은 곧 강해질 정의 아닐까? (p. 253)
가족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남자, 여자, 때로는 동물, 그리고 감기 따위로 구성된 단위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그덴 나시) (p. 269)
올리버 웬델 홈즈의 ‘두 지점 사이의 최단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한 지점에서 한 지점으로 가는 최단 경로는 두 점을 이은 직선이다. 최단 경로는 가장 빠른 경로이기도 하다. 그러나 두 점을 이은 직선이 가장 빠른 경로가 아닌 경우가 있다. 빛이 물을 만날 때다. 허공을 출발한 빛이 물속 한 지점에 이를 때 가장 빠른 경로는 수면으로부터 물속 한 지점에 이르는 거리가 가장 짧을 때다. 물에서 빛의 속도는 공기 중에서보다 느리기 때문이다. 수면에서 빛은 굴절되므로 전체적인 경로는 출발점에서 수면, 수면에서 도착점을 잇는 두 개의 직선이 된다. 이것은 빛은 최단시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경로를 택한다는 페르마의 최소시간의 원리다.
이에 테트 창은 이렇게 말한다. “광선은 자신의 정확한 목적지를 알아야 해, 목적지가 다르면 가자 빠른 경로도 바뀔테니까. 광선은 수면의 위치도 알고 있어야 해, 사전에 움직이기 전에.”
누가 곧게 가는 것보다 빨리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입력했는가? 물리법칙 속에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경이로움을 앞에 두고 신의 존재를 읽어내는 과학자들이 있다. 하물며 인간이 창조한 규칙과 규범의 영역에 어떻게 기계적 정의만이 존재하겠는가. 어떻게 법이 질서유지와 정의에만 봉사하겠는가. (p. 270)
실제 재판에서 어떤 표현은 추론조차 불가능한 겨우도 있다. 마치 <가디언즈오브갤럭시>에 나오는 그루트의 말 같은 경우다. 그루트는 ‘넌 누구냐’를 비롯한 모든 질문과 희로애락의 모든 상황에 대해 단 한 마디 ‘아임그루트’라는 말밖에는 못한다. 그루투의 형제이자 가족이나 다름없는 로켓 라쿤만은 그루트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한다. 그루트 같은 사람글이 있다. 피고인이 왜 그러셨습니까? 죄송합니다. 합의는 하셨습니까? 죄송합니다. 가족은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교도에서 출소한 뒤에는 뭘 하실건가요? 죄송합니다. 그의 죄송합니다라는 말 속에는 저도 모르게 술에 취해서 그랬습니다, 합의하고 싶지만 도와줄 사람이 없어 못했습니다, 가족이 있습니다만 연락을 안 하고 산 지 오래되었군요, 출소한 뒤에 열심히 살아보려 했지만 전과자라는 따가운 시선 때문에 계속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라는 말이 숨어 있다. ‘아이엠크루트’를 ‘나는 단순한 나무가 아닙니다. 나도 존귀한 존재입니다.’로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사랑이다. (p. 266, 274)